봄 향기 가득한 3월, 한 올 한 올 피어날 꽃망울 속에 잠재된 자연의 섭리가 경이롭기만 합니다. 땅속 깊숙이 저장된 생명이 운을 틔우기까지 그 내밀한 정서에 반응할 입자의 기상 역시 한 치도 어김이 없습니다. 아무리 드센 추위가 와도 얼음처럼 차가운 땅의 냉기를 극복하고, 긴 시간 동안 잊지 않고 소생의 날을 지키고자 했던 생명의 숨결이기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이러한 기상에 힘입어 만물이 소생하는 약동의 봄, 새로움 그리고 새로움을 담아낼 춘삼월이면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십여 년 전 어느 봄날, 새로움을 담아내기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한 일입니다. 편지를 쓰게 된 동기는 어느 책에 독지가가 올린 글 중에 “내 마음이 새로움으로 거듭날 때 그 주변 사방 10m 안에 있는 모든 생명 역시 새롭게 거듭난다” 는 내용을 접하고 난 후부터였습니다. 비단 주변의 생명뿐 만이 아니라 그 순간, 지구 전체가 동시적으로 새로움으로 거듭 태어난다는 부연설명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그때 그 글을 쓴 독지가가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음을 새롭게 가질 때 나타나는 입자와 파동이 주변 아니 지구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한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본질에 부합하는 원리라는 점에서 필자 역시 마침 이러한 내용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확신, 긍정성, 신뢰성은 그 대상이 사람만이 아니라 미물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게 한다는 사실. 그렇다면 이를 응용하여 모든 생명을 유익하게 하여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작용하였다고나 할까요. 곧 한 생각이 건전하면 모든 생명이 이 건전에 동일한 의식으로 작용한다는 원리에서 이를 응용한 그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다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방편적으로 이를 행하는데 생각을 지니는 것이나, 그러한 생각을 표현하는데 그것이 글이 되었든 말이 되었든 가슴에 담길 감동은 별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단, 한 줄의 글이 심금을 울릴 수도 있고 단 한마디 스치는 말에도 필연처럼 심장을 꿰뚫는 지혜가 솟아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변을 유익하게 할 수 있다면 어느 것이든 수용할 가치는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짐에서 쓰기 시작한 것이 편지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손편지로부터, 전자 메일, 카톡과 페이스북으로 그리고 신문 지상에까지 짧거나 길거나 마음을 담아 보낸 십여 년간의 긴 장정이었습니다. 이제는 편지 쓰는 일이 필자에게는 가장 소중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측면에서 보면 표현하기 나름이긴 하나 말보다 글에 진실이 더 많이 담긴다는 점도 있어 편지 속 주제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성인이나 현자의 말씀을 엮기도 하였고, 마음을 하나로 잇는 철학적 사유에 공감하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경험을 꼼꼼히 살피며 이를 글로 옮기면서 너는 편지 내용대로 그렇게 잘 실천하고 있느냐, 아니 그렇게 꼭 해야 한다는 다짐을 수없이 되뇌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나를 회상하자는 것도 아니요, 미래의 낙관적 사고에 젖어 방심하는 것도 아닌 오직 이 순간에 나 여기 있음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자각은 스스로 지혜를 높임과 동시에 의식을 새롭게 갖추어 하나로 통하는 길을 여는 것이며, 그것이 또한 나를 위한 길이며 나의 본성을 회복하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인생의 목적은 완전하게 태어나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매 순간 다시 태어남을 보면 감정이 상했든, 마음에 상처를 입었든, 누구를 원망하였든, 실의와 실망에 빠졌든 이 순간이 지나가기 전에 오해가 있으면 풀고, 다툼이 있었으면 즉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보내어 또 하나의 새로운 순간을 창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순간에 마음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생명 의식도 동조 현상을 일으키느니만큼 필자에게 편지 쓰기는 일체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데 일조할 명상이요, 춘삼월에 부흥할 지혜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유추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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