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삼일절 기념식이 축소되거나 취소되어 아쉽다. 제103주년 삼일절을 보내며 3·1운동을 이끈 애국지사들의 공헌과 희생정신을 돌이켜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남해의 천도교를 빛낸 고(故) 회암 하준천 선생을 회고해본다.

『천도강론』은 천도교의 근현대시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회암 하준천’(淮菴河準千, 1897~1963) 선생의 생전의 강론 및 어록을 정리하여 편찬한 강론집이다. 2부에는 회암 선생의 스승이기도 하며 천도교 교령을 5대에 걸쳐 연임한 묵암 신용구(1883~1967) 선생의 어록 중에 회암 선생과 연관되는 내용을 함께 편찬하고, 부록으로 회암 선생 제자들의 회고담을 수록하였다.

회암선생은 1897년 11월 1일 남해군 고현면 포상리 천동에서 출생하여, 1914년 진주 농업전문학교 재학 시절 17세의 나이로 천도교에 입교하여 묵암 신용구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이 지역 천도교의 핵심 교역자로 성장하였다.

이후 교직에 있으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묵암 선생의 지도를 받아 1918년 천도교 남해전교실(남해교구 지역 4개 교구 수십여 개 전교실의 전신)을 창설하였고, 3·운동 당시에는 이 지역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31년 불온사상자로 지목돼 교사직 권고사직 및 교직자격 박탈을 당했다. 이후 남해군 설천면 노량양조장 개업, 1932년 천도교 청우당 남해군 대표, 1939년 천도교 남해교구 초대교구장, 1940년 천도교 종법사, 1941년 덕신초등학교(설천면 덕신) 설립, 1941년 노량 충렬사 보존운동 전개 성사, 1946년 식산계(교구소득사업) 창설, 1952년 천도교 연원회 도정, 1960년 수도요체 4강(천도입문, 내성단서사, 참회문, 소년의 서사) 반포, 1963년 2월 11일 남해 노량에서 향년 66세로 환원하셨다. 

회암선생은 독립운동가, 종교지도자, 교육자 

회암 선생은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종교지도자로서, 교육자로서 일생을 보내며 남해를 ‘천도교왕국’으로 포덕하는 지대한 공적을 남긴 이 시대의 사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회암 선생이 천도교의 핵심 교리와 사상을 압축적이면서도 평이한 문장으로 정리한 천도입문, 참회문, 내성단서사, 소년의 서사 등은 깊이 있는 교리 공부를 통하지 않고도 ‘천도’의 핵심을 이해하는 요목으로 이 지역 천도교인들의 금과옥조가 되고 있다.

『천도강론』은 회암선생의 제자인 정암 고(故) 고정훈(천도교 전 교령, 천도교 종법사) 선생이 회암의 강론장에서 일일이 필기한 강의 노트를 저본으로 하여 고정훈 본인의 구술을 참조하며 노트의 기록을 재구성하여 편찬하였다. 천도교단의 경우 근현대 시기 강론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러한 형태의 강론집을 출간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정암 고정훈 선생의 공적이다.

회암선생은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살아가면서 도는 내버리지 마십시오. 천지부모를 효양하는 도가 아닙니까? 부모를 버리면 역천하는 것 아닙니까? 조심하시오. 까마귀 새끼도 반포를 하는데 항차 인간으로서 천지 부모가 나를 낳아주시고 나를 길러주신 대은을 잊을 수 있단 말이오? 그 은혜를 알면 무엇을 어느 정도로 알겠소?”라고 하셨다.

“사람과 한울은 둘이 아니요…”

회암선생은 “천도입문에 우리 도는 본래 사람성 자연을 근본한 것인 고로, 무위이화로 되는 것이니, 내게 있는 한울 마음을 지키고, 한울 기운을 바르게 하고, 한울 성품을 거느리고, 한울 가르침을 받으면, 화기가 자연의 가운데서 나와서, 사람과 한울이 둘이 아니요, 한울 기운이 내 기운이 되며, 내 기운이 한울 기운이 되어, 서로 떠나지 못하는 그 이치를 가지게 하는 것이니라. 지기라는 것은 영부, 즉 대우주의 대생명을 이른 말이니, 지기는 우주 사이에 가득히 차고 넘치는 허령으로, 어느 일에 간섭치 않음이 없으며, 어느 일에 명령치 않은 데가 없어, 형용하여 말할 수가 없고,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으되, 그 산 기운이 한울과 땅의 뿌리가 되어 있으며, 일만 물건이 지기의 속에서 나며, 지기의 속에서 자라며, 지기의 속으로 돌아가나니, 말하자면 지기는 천지의 뿌리며 만물의 어머니며 생명이라. 만물이 그리로 나고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니, 이 또한 혼원의 일기로서 결코 두 가지 물건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해방 이후 전반적으로 천도교의 교세가 해방 전에 비하여 위축되는 가운데 경상남도 남서부 지역의 천도교세는 특출나게 왕성함을 자랑하였다. 그 중에서도 경상남도 남해는 한때 ‘천도교왕국’으로 불릴 만큼 천도교세가 성장하였고, 그 중심에는 바로 묵암 신용구 선생과 회암 하준천 선생이 있었다.

애국심이 남달리 열렬했던 회암 하준천 선생은 강직한 성격으로 의분심도 강하여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였다. 한일합방으로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고 항일구국운동에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회암은 종교인으로서 조국광복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해방 후 한때 남해는 ‘천도교왕국’이었다

후학들이 회암 선생의 애국심을 기리며 덕신초등학교에 세운 <공적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생께서는 포상리에서 출생하시어 진농3기로서 학생시에 천도교에 입교하시어 인내천의 종지를 받들어 70평생을 수도와 포덕에 전심전력, 도사, 종법사, 도정, 선도사등의 도첩을 배수하셨으며 3·1독립운동 남해 발상을 선도하고 ‘학도가’를 창작, 학생들에게 읽혀 애국심을 고취하는 등 구국운동에 선봉 암약하다가 일경에 노출되어 고문을 당하고 교사직을 박탈당하셨다. 이어 노량리에 정착하고 포덕에 주력, 30여년간 천도교 남해군 교구장을 역임. 무려 1200여 도호를 포덕하고 수도요체를 창작 수천의 후학을 양성하는 등 교리전반에 기여한 공이 지대하셨다. 1941년 일본 헌병이 몰려와 노량 충렬사를 파괴하고 민족혼을 말살하려하자 결사 반대운동을 전개 보존하는데 성공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이 지방 교육을 위하여 덕신국민학교를 건립(1940)하는데 주역을 하였으므로 본교 교정에 유공비가 세워져있다. 8·15해방을 맞아 건국과 더불어 활기찬 포덕으로 수많은 민생을 구출하시고 아울러 사회봉사와 농촌계몽 및 광제창생을 몸소 실천 시범하여 애국애족자로서 도성덕립 하신 남해가 낳은 유일한 성자라고도 하였으니 이제 여기에 선생의 공적의 일단을 새겨 영원불망토록 전하고자 하느니라.”
<포덕 131년(1990년) 10월 후학 일동 심고>
 
포상리 달실의 묘비문에는 

또한 회암선생은 3·1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천도교 교역자로서, 교육자로서 살기 좋은 남해를 만들기 위해 성심성력을 다하여 일생을 바쳤다. 남해군 고현면 포상리 달실에 있는 묘비문을 소개한다.

선생은 포덕 38년(1897) 11월 1일 남해군 고현면 포상리 하일청씨의 차남으로 뛰어난 천품과 재질을 타고 나셨다. 어머님을 여의시니 인생의 허무와 당시 국운의 일비를 느끼시고 인생의 본질과 구국의 길을 찾아 인내천의 종지아래 보국안민, 광제창생, 포덕천하의 큰 이상을 가진 천도교에 입교하셨다. 그 후 독립운동에 참가 일제의 지단으로 교원직을 사퇴하셨고 50여년을 하루같이 즐풍목우 수수산산을 발섭둥지를 찾고 찾아 포덕과 교화로써 신앙의 핵심이 찬 금사옥사로 다듬어 주시고 시운시변에 따른 시대교화에 주력하실 제 명명한 새 운수를 바로 받도록 천도입문, 소년의서사, 내성단서사, 참회문 등을 성문화하여 설법하시니 탁월한 교화력은 무왕불복의 운이 남해전도를 감돌고 독신교인 수천호를 마치 천도교왕국을 방불케 하였으니 천병의 냉엄이여! 포덕 104년 2월 11일 66세의 일기로 환원하시니 묵암 신용구 선생은 공문에 안연의 죽음을 회상케 하셨다. 우리는 용담 연원의 후천 새 운수가 저 바닷물처럼 억만년 무궁토록 연면히 흐를 것을 믿고 천덕사은을 길이 빛내고자 유서 깊은 노량 뒷산 선생의 묘소에 비를 세움. (2010년 4월 8일 묘소를 남해 고현면 포상리 1160번지(문중평장묘역)로 이장)
포덕 115년 5월 25일 회암 하준천 선생 묘비 건립위원회 삼가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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