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2월과 1월은 긴세월 동안 근무하던 직장에서 퇴직을 하게 된다. 군청 등 공직이나 농협등 공공기관에서 은퇴한 선배들을 만나 보면 다들 갑자기 아무도 찾지 않아서 외롭다고 한다. 퇴직 이후 두 달 정도는 비가 오나 바람 불거나 춥거나 출근할 걱정이 없어 엄청 편했는데 세 달째 접어들면서 갑자기 갈 곳도 딱히 없고, 멍해지면서 힘들다는 것이다. 

등산이나 걷는 것, 자건거 타기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똑 같이 친구나 지인들을 만나다 보니 삶의 변화가 없어 힘들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직장에서 벗어나 취미나 일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소개받을 때 제일 적응하기 힘든 것이 명함 문제라는 것이다. 공공기관에서 근무한 사람들은 대부분 지위를 떠나 우리 사회의 갑이라는 신분에서 평생 지내 오다가, 문제는 막상 은퇴해보니 공직에 있을 때와는 달리 별로 알아주지도 않고 알아서 모시거나 찾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 나름대로 안정된 지위에 있던 잘나가던 사람들의 문제다. 권한을 행사하던 옛 직장을 머리에 생각하면서 자신의 존재 또는 위치가 바뀐 데 대한 주위 환경에 대한 인식을 상당 기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은퇴 이후 이 같은 환경에 스스로 적응이 되지 않은 유명한 정치인들이나 고위직 공직을 지낸 이들은 방구석에서 벗어나길 싫어한다는 것과 어딜 나가길 꺼린다는 것이다.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일수록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쉽지 않고 이런 상태가 상당기간 계속 되면 힘들고 자신도 힘들고 가족이나 주위 사람도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은행장급 고위직과 대기업 임원의 은퇴 이후 삶이라는 기사에서 본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습성은 대접받는 버릇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다. 

어느 날 교외의 괜찮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는데 뒤통수가 따가워 돌아보았더니 아내가 자신을 어이 없다는 듯 쳐다보며 계산을 하고 있더란다. 비서가 법인카드로 계산하거나 아니면 대접받거나, 늘 두 가지 선택지만 있었던 사람에게 생기는 흔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어느 대기업 임원 출신 멤버는 은퇴 후에 “나는 한 달 골프 약속이 풀 부킹되어 있다”고 자랑하곤 해서 ‘곧 외로워지겠구나’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1년 뒤에 보니 거의 골프를 끊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전직 퇴직자에게 계속 접대 골프를 쳐주는 관대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착각한 것이다. 남에게 대접받던 고위직 버릇은 쉽게 고치지 못하는 반면 본인이 비용을 쓰는 데는 급격히 인색해진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었다. 잘 나가던 사람들의 특징은 현재의 위치가 영원할 것으로 착각한다는데 있다는 것이다. 

은퇴 후라도 경제적인 면에서 여유만 있다면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지니까 할 수 있는 게 많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실에서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은퇴 후 넉넉한 시간이 오히려 고통이라는 사람이 많다. 시간이라는 게 부족할 때는 한없이 소중한데, 넘치게 있으면 주체하기 힘든 속성이 있다. 

은퇴 전에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못 한 일이 꽤 많았을 텐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그것은 단순히 하고 싶은 일, 희망 사항 정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은퇴 후 풍부한 시간에 짓눌리는 데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은퇴한 후에 뭘 했으면 좋겠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없고, 둘째는 하루 일과표와 은퇴 후 첫 1년은 어떻게 보낼지, 3년차에는 무엇을 할지 등 마스터플랜이 있어야 하는데 없고, 셋째는 여가나 취미, 오락이라 하더라도 꽤 준비가 돼 있어야 하는데 전혀 준비없이 은퇴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가 생활도 미리 준비한 사람이 잘한다. 거의 매일 종편이나 유튜브의 정치 얘기만 하루 종일 듣고 나름 정치 전문가가 된다. 온갖 떠도는 뻔한 얘기에 세상 걱정을 혼자 다하면서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하고 손바닥만 한 휴대전화와 종편TV에 하루 종일 머리 처박고 사는 게 은퇴한 한국 남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추억은 아름답다. 하지만 추억만 먹고 살아야 한다면 남아 있는 인생이 힘들다고 한다. 

인생 이모작 새로운 취미나 일을 시작하면 추억을 만들어낼 수 있다. 비결은 간단하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면 된다.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사람을 만난다면 누구든 곁을 내 줄 것이다. 정년을 맞은 후라 해도 90가까이 살아가는 제2의 인생에서 무언가 새로 시작하기에 어려운 나이는 아니다. 오히려 인생의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기에 적합한 나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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