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태 무창선면 온리원 펜션 / 시인ㆍ수필가
하 태 무
창선면 온리원 펜션
시인ㆍ수필가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진리이다.

하지만 이 말은 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나 아프고 섭섭한 말일 것이다. 아프고 싶어 아픈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더구나 멘탈(정신)이 멀쩡한 내 환자의 경우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수술 후 만 삼 년을 다섯 곳의 병원을 따라다니며 1대 1간병을 했다. 양평국립교통재활병원과 경상대학병원은 공식적으로 1대1 보호자 간병을 할 수 있었지만 일반요양병원은 윈칙적으로는 보호자가 환자와 함께 지내며 간병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다행히도 십여 년 전 요양보호사 자격을 딴 상태라 코로나 사태 전에 병원 측의 허락을 얻어 빈 병동에 함께 오래 있을 수가 있었다.

재활이 필요한 환자가 꼭 들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말은 ‘재활에도 골든타임이 있다’는 말이다.

사고 직전의 건강할 때의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6개월 이내로 죽기를 작정하고 재활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걸 국립양평교통재활 병원에서 알았다.

수술한 병원에서도 그 이후의 여러 재활 병원에서도 알려주지 않았던 말이었다. 우리가 그 말을 들었던 때는 이미 2년이 지나려 할 때 몸은 이미 굳어서 재활이 어려울 때여서 속으로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24시간 간병. 팔다리도 못 쓰고 스스로 숟가락질도 못하지만 두뇌 운동이 형형한 환자에게 해 주어야 할 간병인으로의 책임은 막중했다. 갑자기 쓸개에 돌이 움직여 큰 병원으로 실려 가서 수술을 받는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재활에 신경을 쓰느라 서너번이나 낙상까지 했다.

휠체어에 앉아 기침하다가 몸이 흔들려 앞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코와 이마를 심하게 다쳐 피가 무섭게 나오더니 급기야는 폐렴에 인공호흡기까지 달아야 하는 응급사태가 발생키도 했다.
급기야 점점 삼킴운동도 잘 안 되어 배에 구멍을 뚫어 위류관으로 음식을 주입하는 1급 중환자가 되어 버렸다. 수술 직전에 지팡이를 짚고 걸어 들어간 환자가 수술 후 3년도 안 되어 그런 사태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에 환자는 수술한 집도의에게 사기꾼이라며 난리를 쳤다.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정신이 멀쩡하니 어쩌랴. 사진작가로 천지사방을 누비던 내 남편은 결국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지내게 되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할까. 여기에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지니 병원에서 환자나 간병인에게 제재는 더욱 강화되고 답답함을 못 견딘 환자는 결국 나아지지도 않는 병원 생활을 접고 집으로 퇴원을 하게 된다.

오는 시간을 알 수 없는 ‘장애자 택시’를 타보니

이로 인해 국가에서 정한 좋은 제도 ‘장애자 택시’를 이용해서 병원에도 가고 간단한 나들이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승용차에 탈 수 있었던 몸이 이제 승용차에 타려고 잠깐 버틸 힘도 없으니 휠체어를 탄 채로 탈 수 있는 장애자 택시는 정말 필요한 제도였다. 등받이도 없이 앉아 있어야 하니 흔들림이 심한 길을 덜거리고 갈때는 괴로움을 호소하기하고 모든 제도가 다 그렇듯 약간의 불편함은 있었다.

우선 시간의 문제, 약속 시간이 잡혀 있는 병원에 가는 일은 제약 때문에 늘 불안했다. 콜센터에 전화해도 장애자 택시 차가 몇 시에 오는지를 모르는 일이다.

단지 몇 번째라고는 알려 줄 뿐 그 차가 몇 시간이나 몇 분이 걸려 환자에게 올지는 콜센터에서도 모른다고 한다. 혹여 점심시간이라도 걸리면 운전기사도 점심을 먹어야 하고 그 점심이 얼마 걸려 끝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첫 번째 순서가 아니면 정말 차가 언제 오는지를 알 수가 없으니 병원 예약시간에 댈 수 없어 불안하다. 차가 여분이 많으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으니 늘 불안감에 시달린다.

둘째는 왕복 예약은 안 되고 편도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가을, 단풍이 고운 국립 편백림의 아름다운 단풍길을 환자에게 보여주고 심었다. 하필이면 토요일, 장애자 택시는 토ㆍ일요일은 두 대만 운행한다고 했다. 오전 9시에 전화를 했다.

세 번째 순번이니 조금 많이 기다리라고 했다. 몇 시간이나 몇 분 후가 아닌 ‘조금 많이 대기’.

소풍 가는 기분이라도 낼 요량으로 김밥을 싸고 환자가 먹을 죽도 싸고 과일이랑 보온병에 따뜻한 물도 담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차가 너무 오지 않아서 환자에겐 점심을 미리 먹였다.

12시가 조금 넘으니 차가 도착했는데 토요일은 차가 5시에 운행을 중지하고 두 대 뿐이니 돌아올 때 잘못하면 차가 끊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때가 오후 1시 경이었다. 마음이 급해서 편백림에 내리자마자 콜센터로 전화를 했다.

마음 같으면 바로 갈 테니 기사에게 한 20분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미 예약을 받은 손님이 세 명이나 더 대기 중이라 했다.

두 대 중 어떤 차가 올지도 모르는데 일단 우리가 탔던 차는 기사가 점심식사 전이었다.

환자는 와상환자여서 한 시간 남짓이 휠체어에 앉기 전까지의 한계 시간.

햇볕 잘 드는 내산 머리를 바라보고 앉았다가 과일 좀 먹다가 한 삼십 분 지나니 보채기 시작한다. 전화해도 소용없는 일을 자꾸 콜센터 전화를 해보라 한다. 돌아온 대답은 몇 시에 도착할지는 모른다는 것.

시간 단축을 위해 내산 저수지를 따라 휠체어를 끌고 걸었다. 휠체어가 털컥할 때마다 내 가슴도 털컥거렸다. 타고 갔던 그 차가 배정되었다기에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아직도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미조에 손님 내려 주고 시내로 갔다가 다랭이마을 갔다가 점심도 안 먹었으니 점심 먹고 휴양림으로 온다고 한다.

그저 하염없이 걸었다. 그 시간이라도 줄여 택시를 중간에서 만나기 위해.

내산 저수지 끝자락 쯤에서 차를 만났다.

단풍이 기차게 아름다웠으나 아픈 환자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얼른 집으로 가서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테니까, 집에 오니 5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침 9시의 설레던 마음과 오후 5시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마음의 온도 차는 컸다.

“이제 다신 편백림의 편자도 들먹이지 말고 단풍의 단자도 들먹이지 마”

그래서 그 다음, 경상대 가는 날은 환자는 두고 나 혼자서 약만 타 왔다. 장애자 택시가 무섭다고 한다.

그렇게 한해가 또 까무룩 갔다.

다니기 좋아하던 환자가 피폐해질까 봐 매일 스트레칭 두세 번에 노래를 부르게 하고 책도 읽어 주고 기도도 함께 한다. 그건 병원에서부터 내가 환자에게 베풀던 일상사다.

환자는 학교 때 합창부를 했다고 가곡들을 많이 알았다.

안 나오는 소리지만 내가 그의 뚫린 목구멍을 손가락으로 눌러주면 요즘은 곧잘 노래를 부른다.

“푸른잔디 풀 위로 봄바람은 불고 / 아지랑이 잔잔히 끼인 어떤 날”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따뜻한 봄날이 오면 다시 장애자 차를 타고 남해대교 부근으로 가볼까? 이번에는 토요일은 피해야지.

환자가 안 간다고 할지도 모르는데 나는 혼자 생각으로 부풀어져 환자에게 시를 한 수 읊어 준다.

한껏 감정을 넣어서.

 

봄 강가에 와서 - 박영식  

때 묻은 우리네 삶

하루쯤 밀쳐두고라도

아지랑이 아른대는

강둑길을 걸어보자

새 봄을 맞는 강물도

부풀어 있지 않느냐

일상의 궂은 일은

없었던 걸로 흘려놓고

끼루룩 물새 울음

물빛이나 익혀보자

서투른 몇 줄 詩心

반짝이지 않느냐

투망 쳐 봄을 깃는

거룻배가 둥실떠듯

아득히도 그리운 이의

이름이나 외며 걷자

휘파람

저 환한 음색이

눈물 곱지 않느냐

()

한바탕 노래를 부르고 노래로 성가를 부르면 그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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