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는 이쪽과 저쪽, 물체에서 물체로 이어지는 거리상의 간격을 말합니다. 또한, 사이는 일의 성사, 추진. 비교, 친분 등을 논할 때 평가의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가까운 사이, 먼 사이, 절친한 사이, 눈 깜짝할 사이, 밖과 안 사이 등이 그렇습니다. 특히 우리가 ‘사이’를 거론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지난 시대와 지금 시대를 비교할 때입니다. 지난 시절에는 ~을 했다거나, ~을 이루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못하다거나 또는 지금의 성공은 그때의 경험이 없었으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예가 50년대 말이나 60년대 시기에 지금의 중장년이 경험한 농경사회의 변화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보릿고개와 재례식 농법에서부터 식생활 습관, 위생, 교육, 환경, 문화 등에 이르기까지 생활 전반에 드러난 양식이 급격히 변화하였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이 시기를 특정한 것은 변화의 양이나 질이 거의 한 세기를 가름할 정도로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오감(五感)을 통하여 절실히 체감되는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말을 하거나 혀로 맛을 느끼는 과정을 통하여 변화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면서도 변화의 주체가 될 원형을 얼마만큼 보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원형이란 외형의 모양이나 색상이라기보다 그 내면에 흐르는 고유한 정신의 순수성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순수는 실체적 진실을 간직한 본성입니다.

이처럼 소중히 잠재된 본성은 사람이 감정에 쫓기게 되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만큼 어떠한 변화를 지속하더라도 이를 다스릴 사람의 마음이나 정신이 순수를 잊지 않도록 배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문명에 종속될 것이냐 아니면 정신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가름할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치를 특정할 때 인디언들의 삶의 원형을 보존하는 일이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의 저서 오래된 미래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원형을 보존한다는 것이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미 자기 안에 지닌 본래의 순수를 되찾는 일입니다. 사이와 사이를 이끄는 것은 물질이나 자산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담긴 본성 차원의 순수 정신이 토대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탐구하고 또 탐구하여야 합니다. 

이 시대의 중심이 될 순수의 원형은 무엇인가? 내 안에 간직된 본래의 순수는 어떠한 모습으로 또 어느 때에 발휘되고 있는가? 만약에 이러한 순수가 내 안에서 결여되어 있다면 왜 무엇 때문인가? 없다면 이를 충족할 방법은 무엇인가? 또한, 나와 너 사이를 형성하며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나는 과연 사이로 대변될 현재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충실히 임하고 있는가? 행여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어 이곳이 지닌 특별함을 놓쳐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느 시기이든 항상 최초가 될 현재와 5분 전의 관계는 어떠한가?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를 어떤 감정이 도래하더라도 적절히 유지할 수 있는가? 사이와 사이를 이을 관대함은 또 무엇인가? 사이를 가장 원만하게 할 용서와 이해와 자비와 사랑의 심성을 기르는 데 주저함은 없는가? 이러한 담론이 자연과 문명에 깃든 순수 원형을 회복한다는 차원이라면 이를 현실화할 용기는 없는가를 묻고 또 묻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순수를 배경에 둘 ‘사이’는 끊임없이 이 같은 물음을 응답과 함께 요구할 것입니다. 그것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나에게 다가오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는 가운데서도 말입니다. 

굳이 이러한 물음을 외면할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마음과 마음 사이를 들뜨게도 하지 않고, 잡념과 망상이 스며들지 않도록 집중력을 얼마만큼 고조시키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거론한 것은 사이에서 통용될 최고의 가치라는 점에서 명상이나 수련이 필요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사이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경계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요. 이는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니요, 하나로 통하는 사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늘도, 산도, 바다도, 숲도, 사람도, 물건도 모두 나에게 귀결되어 나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일체 생명이 둘이 아니요, 하나인 관계에서 심안(心眼)으로 보일 대상인 저쪽도 나요, 나의 형상도 나이니 오직 내가 나를 바라보고 짓는 것이요,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며 내가 나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이를 매개로 한 인간관이라면 이러한 사이에 어찌 다름으로 다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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