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원 도부산 향우
장 원 도
부산 향우

초대 남해 접주(장종건)의 아들인 장기홍(1858년생)이 제2대 남해 접주가 되었다. 교명은 의암이다. 

일본군에 대한 최후의 대반격전인 하동대첩에서 사전에 비밀이 누설되어 실패로 돌아가자 해월 선사는 정부군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게 된다. 이어서 손병희 성사가 동학의 3대교주가 되었다. 손병희 성사는 교주가 되면서 (그 이전부터) 구한말 정부에 거슬리는 행동을 많이 했으므로 정부에서 체포령이 내렸다. 이에 손병희 성사는 일본군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망명을 가게 되었다. 일본으로 가면서 남해에 들러 병상의 전 접주(장종건)를 문병하고 접주에게 개벽활동(개화활동)을 강화하고 이용구에게 교주를 대행하게 했으니 협조하여 교무 활동을 잘할 것을 부탁하였다. 또한 동경 유학생을 보내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장기홍 접주는 전별금을 드렸다고 한다. 

손병희 성사는 상하이와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던 도쿄 등을 돌아보면서 인재 양성의 시급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1905년 8월에 동학교단은 1·2차에 걸쳐 동학교도의 자녀 중에서 40명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시켰다. 이때 남해교단에서는 세 명의 유학생을 선발하도록 했다. 보통 다른 군에서는 두 명을 선발했는데 남해는 동학교도가 특히 많았던 관계로 세 명을 지명했다고 한다. 선발된 사람은 장기홍의 아들과 유 씨, 이 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일차 유학생으로 선발된 사람들은 부산에 모여 일본으로 가기 위해 지금 봉래초등학교 앞에 있었던 영주동 일본인 여관에 투숙하고 있었다. 이때 풍랑이 심해서 떠나지 못하고 바다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장기홍의 아들(두환)이 갑자기 복통과 설사를 심하게 했다. 주최 측은 이질로 생각해서 집에 연락을 했다. 접주 장기홍이 부산으로 내려와 보니 병세가 심상치 않고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라는 지시가 있어 아들을 남해로 데리고 가고 대신에 작은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 사이에 날씨가 호전되어 배가 떠나버려서 장기홍 접주의 작은 아들도 일본으로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해에서 일본에 간 동학 유학생은 이 씨와 유 씨 두 사람이었다고 한다. 유 씨 성을 가진 분은 일본에서 신식공부를 하여 훗날 일제 강점기에 법관이 되었다가 뒤에 진주에서 변호사를 했다고 한다. 장기홍의 손자는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40년 초여름에 지병이 있어 진주도립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간 일이 있는데 그때 아버지와 함께 유 씨 성을 가진 변호사를 만났다고 한다. 그 변호사는 그의 아버지를 반갑게 맞이하고 국밥을 사 주어서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고 했다. 

장기홍의 손자(증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뒤에 해방이 되자 나는 부산으로 내려와 경남중학교에 편입해서 다니고 있었다. 내가 5학년 때인 1948년 6월 가출했다가 일년 뒤인 1949년 5월에 형님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6학년에 진급하고 애육원에서 만난 ‘임옥인 여사’의 충고대로 대학을 가기위해 매일 밤샘하며 그동안 까먹은 수업을 만회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7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흰 바지저고리에 갓을 쓴 정장 차림으로 나의 방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드리고 나니 일어나시며 같이 좀 나가자고 하셨다. 전에 보지 못한 아버지의 행동에 말없이 따라 나섰다. 

부산역 근처 사십 계단을 올라 왼쪽 도로를 따라 갔는데 중부서(당시는 부산경찰청) 뒤 오르막길을 지나 영주동 내리막길 조금 앞에서 너는 여기 있어라 하시고는 한참동안을 그 일대의 일본식 집과 여관 등지를 몇 바퀴 돌고 오더니만 못 찾겠다고 하시고 그만 가자 하시기에 왔던 길을 다시 돌아 중부서 뒷마루 근처에 앉으시며 나보고도 앉으라고 하셨다. 말없이 따라 앉으니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들이키고는 하시는 말씀이 ‘내가 옛날 아버지가 시켜 동학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가기 위해 여기 와서 일본여관에 모여 며칠을 묵었다. 그때 마침 큰바람으로 배가 떠날 수 없어서 며칠을 묵고 있는데 내가 복통에다가 열이 심하게 났다. 일본인이 이질인가 보다 하고는 아버지께 연락하여 아버님이 내려와서 나를 데리고 올라가고 너희 작은아버지를 데리고 내려오니 배가 이미 떠난 뒤였더라. 그래서 나도 못 가고 너의 작은아버지도 못 가게 되었다. 그때 내가 일본 가서 공부하였더라면 너희들은 이 고생을 하지 않을 텐데’ 하시며 못내 아쉬워 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전에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나의 가출이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증언자의 구술로 보아 당시 남해 동학도 중에서 동경 유학생 대상자는 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장 씨(장두환)와 유 씨(진주에서 변호사를 함)는 확실한 것 같은데 이 씨는 증언자도 모르니 지금으로서는 본인이나 그 인척들의 증언이 필요해 보인다. 혹시 알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연락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 이 글의 증언자는 부경대 명예교수이신 장수호 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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