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욱 작가
임종욱 작가

언젠간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 남해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뭍과 뭍을 갈라놓은 푸르른 융단 노량해협과 그 너머 아스라한 초록의 남해. 그리고 뭍과 뭍을 이어주던 주황의 남해대교.

누구는 노량(露梁)을 ‘이슬다리’라 했는데, 아득한 옛날에도 이 해협에 ‘다리(橋)’가 놓여 섬사람들과 뭍사람들의 ‘다리(脚)’ 구실을 할 줄 알았던가 보다. 그 다리를 건너 분홍 벚꽃의 터널을 가로지르며 꼬불꼬불 이어지는 이차선 도로는, 마치 스무고개 수수께끼를 풀 듯 나를 남해의 속살로 이끌었다.

문화원의 의뢰를 받아 『서포집』을 번역하고, 그때의 영감을 기둥 삼아 장편소설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를 썼다. 신들린 듯 행간을 글자로 막힘없이 채워나갈 때까지도 나는 소설의 배경 남해가 내 인생에 이처럼 큰 비중을 차지할 줄 몰랐다.

김만중문학상에 작품을 응모하고, 다시 밟은 남해는 이미 내게 낯선 타지가 아니었다. 노도에 있는 김만중의 가묘를 참배하면서 “소설이 당선되면 꼭 남해로 와 살면서 당신처럼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쓴 후배가 기특했는지 서포는 놀라운 가피력으로 대상 수상이라는 낭보를 전해주었다.

선정 소식을 들은 나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남해행 버스에 몸을 얹었다.(물론 책과 짐을 실은 트럭이었지만) 그렇게 도착한 남해에서 나는 벌써 열 번째 겨울을 맞이하는 중이다.

대입현과 소입현, 대벽과 소벽, 대량과 소량. 사이좋은 남해도와 창선도처럼 형제의 이름으로 어깨를 비비는 이웃 마을들. 노도와 호도, 조도……, 조개무지처럼 흩어져 있는 아기자기한 아기섬들. 어떤 보석의 이름보다도 이들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누리 안에 모두 담는다.

우리들의 고향 / 색연필화
우리들의 고향 / 색연필화

그래서 지금 남해는 우리들의 고향을 넘어 나의 남해로 자리한다.

푸른 바다 남해를 몰랐다가 남해를 알기까지 지나온 그 멀고 길었던 시간은 귀소(歸巢)의 보금자리에 닿으려는 도움닫기의 몸짓이었나 보다. 울트라마린블루의 원피스와 차이나레드 빛 코트를 입은, 갈색 머리와 동그란 얼굴을 지닌 여인과의 만남에 이르는, 가슴 설레는 한 편의 예술영화. 이 영화의 클로징 크레디트에는 당연히 남해에서 만난 수많은 주인공의 이름이 별빛처럼 새겨지리라.(외래어가 난무하는 글이지만, 이 단어에 맞는 우리말을 아직 찾지 못했다.)

첫 해 물건마을, 난폭하게 쏟아지는 폭설 속에서 나는 경이로움에 몸을 떨었다. 푸른 바다와 초록 들판, 주황의 다리를 넘어 남해는 순백의 외투로 치장을 해버렸다. “강나루 건너서 솔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걷는” 나그네처럼 나는 지금도 남해의 길목과 골목을 “꿈길을 가듯” 손금의 결을 더듬는다.

오늘도 나는 남해에 예쁜 집을 짓고 풀밭을 거닐면서 새와 짐승들과 물고기들과 사람들의 손을 잡고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남해라는 만화경을 탐구해나가는 꿈을 꾼다.

그 동안 부족한 그림과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더욱 영근 모습으로 인사할 때까지, 다시 만날 때까지 모두 강녕(康寧)하시길 바란다. 올 겨울에는 꼭 대설(大雪)을 만났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