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 남해지역의 동학(東學) 이야기
보물섬 남해지역의 동학(東學) 이야기
  • 남해신문
  • 승인 2021.11.2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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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성 완 남해경찰서 청문감사관
정 성 완
남해경찰서 청문감사관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 1844년 5월 15일 ~ 1912년 5월 23일)은 1892년 고부 군수 재직 중 관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만석보를 쌓았다. 그는 이곳의 물을 제공받는 논에 첫해에는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수세를 징수하고 자신의 모친상 때 부조금 2000냥을 거둬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창혁에게 곤장형을 가하여 때려죽이고 무고한 주민을 잡아다 온갖 죄를 뒤집어씌워 보석금을 지불하게 하는가 하면, 대동미를 쌀 대신에 돈으로 거두고 그것으로 저질의 쌀로 교환해 중앙에 상납하고 차액은 착복하는 등 조병갑의 악정(惡政)이 굶주린 농민들을 착취해 온 것이 촉발되어 전봉준 등 농민들이 조선 고종 31년(1894) 3월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다. 

조정은 힘을 잃고 무능함을 노출한 채 일본군을 끌어들여 대안없이 진압에만 급급하자,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를 기치로 전라도 고부 지역에서 주변지역으로 순식간에 확대되어 조선 봉건사회의 억압적인 구조에 대한 불만이 아래서 위로 향하는 농민운동으로 확산되어 결과 청·일 양군이 한반도에 진주(進駐)하여 청·일전쟁으로 발발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남해에 동학이 전래된 연도는 1893년 산청 백락도의 수교인인 진주 접주 손은석이 당시 남해면 야촌에 거주하는 여장협에게 전도하고 여장협은 이종목과 정용태에게 전도하고 정용태(鄭龍泰)는 남해접주로 이종목은 대정으로 활동했다고 전한다. 여장협은 뒷날 하동으로 건너가 하동 접주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1893년 봄 하동, 진주, 성주, 선산 인동지역 동학교도와 함께 보은취회에 참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중 정용태 남해접주는 동학농민군 수천 명을 이끌고 1894년 11월 11일 하동군 옥종면 고성산 전투에 인근 지역 농민군 등 5천 명과 함께 참가하여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1개중대 병력과 교전타가 186명의 전사자만 낸 채 패퇴하였다고 한다. 남해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우우통’ 이라는 말이 돌았다고 하는데 ‘우우통’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악질관료와 지방수령을 끌어내어 짚둥치에 실어 설천면 노량 앞바다에 띄워 응징하는 형벌로 ‘우우통’의 발상지는 남해군 남면이다. 남면 면민들이 서면 연죽 삼거리에서 서면 면민들과 합류하여 남해읍으로 가고 이동면과 삼동면 지역민들은 죽산마을로 오면, 군민 전체가 죽산마을에 집결, 현청으로 쳐들어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남해에서도 조병갑과 비슷한 악질관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이 경상남도와 남해에서도 이미 일본군들이 진주해 있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남해 동학운동 활동지인 임진성 입구
남해 동학운동 활동지인 임진성 입구

남해 군아를 치기 위해 남면 죽전마을에 집결했던 동학농민군 집결지와 남면 상가리 동학농민군이 주둔하면서 일본군과 교전했던 경상남도 기념물 제20호 임진성(壬辰城, 일명 민보산성 民保山城), 인근 남면 상가리 기왕산(起王山 105.1m, 일명 기림산) 전투를『서울대 규장각 고문서』에는 1894년 10월 11일 호남의 동학농민군 19명이 남해로 들어와 현감을 위협해 죄수 16명(동학교도)을 석방한 뒤 남해 농민군 200여 명과 13일 진주로 되돌아갔다는 기록이 기왕산(기림산) 전투를 대변하는 듯 하다. 동학농민군 남해접주 정용태가 기포하고 활동한 남해읍 야촌마을, 1894년 9월 11일 동학농민군이 관아를 점령하여 옥에 갇혔던 동학교도를 석방했다는 남해 현청 점령터(현, 남해군청 위치) 등으로 정용태 접주는 1894년 10월 남해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에 참여하였으며, 정원섭(鄭元燮, 1873년 6월 21일∼1945년)은 고현면 집강으로 군량미를 모아 동학농민군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양익주(梁翼柱, 응천 應阡, 1859년∼1925년)는 남면 오리에서 출생하여 1894년 남해지역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타가 체포 투옥되었으나 탈옥하여 1925년 11월 21일 고향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오늘날 정부는 2008년 2월 29일 법률 제8852호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명예회복에 나서는 한편, 시도의회와 시군의회에서도 후속으로 조례안을 제정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경남도의회에서 2020년 4월 24일 ‘경상남도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였으며, 산청군 의회에서도 2019년 9월 3일 ‘산청군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였다. 남해군은 동학의 후예 천도교 교령을 5명이나 배출한 유일무이한 군(郡)으로 남해군의회에서도 ‘남해군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조속히 제정하여 국민통합의 길을 마련토록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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