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와 천도교의 뿌리 깊은 인연 어디서 시작됐나?
남해와 천도교의 뿌리 깊은 인연 어디서 시작됐나?
  • 윤혜원 기자
  • 승인 2021.11.2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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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대도 ‘동학’이 민족종교 ‘천도교’로 변화
오는 13일 남해문화센터에서 학술대회 열려
송범두 교령
송범두 교령

남해와 천도교의 인연은 뿌리가 깊다. 천도교 최고 지도자인 교령을 다섯 분이나 배출했으며 지금도 천도교 중앙총부 주요 직책에는 남해인들이 포진해 있다. 이와 함께 남해에서의 천도교 교세도 활발하다. 이런 남해와 천도교의 깊은 인연을 탐색해보는 귀한 자리가 마련됐다. 오는 13일 남해문화센터에서는 ‘남해 동학혁명과 천도교’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린다.

학술대회를 준비한 천도교 송범두 교령은 “학술대회를 계기로 무극대도를 주창했던 동학이 민족종교 천도교로 변화되는 과정, 항일운동으로 핍박을 받으면서도 민족종교의 지위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천도교를 남해인들이 더 잘 알고 남해와 천도교의 깊은 인연을 토대로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학술대회에 앞서 동학이 민족종교 천도교로 변화 발전한 과정을 천도교 중앙총부의 도움을 받아 정리했다.

반봉건 반침략 기치 내건 동학운동이 모체
천도교는 1860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시천주(侍天主)를 기본교리로 창도한 무극대도 동학을 모체로 하는 우리나라의 자생종교다. 그 후 수운 대신사는 1863년 8월 14일 제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선생에게 도통을 전수한 데 이어 1897년 12월 24일 제3세 교조 의암 손병희 선생이 도통을 계승한 후 1905년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학이 창도 이후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표방하여 포교하기 시작하자 수운 선생은 이단(異端)으로 몰려 순도(殉道, 도를 지키기 위해 희생당함)했다. 이후 제2세 교조 해월 선생은 수운 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기 위해 공주·삼례·광화문·보은 등지에서 신원운동(伸冤運動)을 전개하는 한편 1894년에는 반봉건·반침략의 기치를 들고 동학혁명을 거사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학농민혁명이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자 동학교도들은 고향을 떠나 성(姓)과 이름을 바꾸어 유리방황하는 가운데 제2세 교조 해월 선생마저 관가에 체포되어 순도하는 아픈 역사를 갖게 된다.

의암 손병희 선생,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제3세 교조는 의암 손병희 선생이 이어받았다. 의암 선생은 추적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한 후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여 선포함으로써 천도교시대를 개막했다. 의암 선생이 동학을 천도교로 명칭을 바꾼 것은 ‘도는 천도이나 학인즉 동학(道雖天道 學則東學)’이라는 천도교경전 구절에 근거했다. 이로써 억압받던 동학의 은도시대(隱道時代)에서 탈피하여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됨으로써 천도교의 현도시대(顯道時代)를 맞이했다. 천도교에서는 이날을 기념해 매년 12월 1일에 현도기념식을 거행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 선포 후 귀국해 그 다음해인 1906년 2월에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공포하고 서울에 천도교중앙총부를 설립하는 한편 전국에 천도교대교구를 설치하는 등 동학시대의 종단을 근대적 종교체제로 개편해나갔다.
전국적으로 72개 대교구와 그 산하에 중소교구를 설치하는 등 신속하게 교단조직을 정비한 후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단행하여 송병준과 이용구 등 배교친일(背敎親日) 두목 62인을 출교 처분함으로써 교단의 친일 누명도 청산했다.

일제 강점기 3·1만세운동 주도
그러나 우리나라는 천도교가 현도된 지 5년 후에 일제에 강점되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했다. 이와 동시에 일제는 교육기관과 종교단체를 제외한 국내의 모든 단체들을 강제해산시키고, 언론·출판과 집회를 엄금하는 등,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무단통치를 실시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도 동학을 천도교라는 종교 명칭으로 현도함으로써 강제해산의 비운을 면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에서 의암성사의 결단이야말로 한울님의 감응에 의한 선견지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천도교는 낙후된 민도(民度)를 고양하기 위해 교육·언론·문화할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한편 특히 1919년에는 천도교의 전적인 주도 아래 청사에 빛나는 3·1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우리의 민족혼을 세계만방에 과시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남해 천도교인들의 만세운동
남해의 3·1 만세운동도 천도교인들이 주도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자료로 증명되고 있다. 독립기념서를 조직적으로 만들어 배포하고 그것을 품에 안고 들어와 만세운동을 주창한 이들도 천도교인들이었고 그로 인해 고초를 받은 이들도 모두 천도교인들이었다.
송 교령은 “그 역사를 오늘 우리는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지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남해인들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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