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임 종 욱

남해읍에 살 때 나는 이따금 걸어서 선소항에 갔다. 

굴다리를 지나 문화원을 끼고 굽이진 도로를 걸어가면 30분 만에 선소항에 닿았다. 왼편 끝자락에 있는 <장량상동정마애비>도 구경하고, 오른편으로 이어진 해변도로를 따라 쇠섬까지 가보기도 했다.

선소항은 언제 가도 아름다운 항구다. 새벽 동이 틀 무렵 가면 멀리 금산부터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아침노을이 그렇게 멋질 수 없었다. 한낮이면 쨍쨍한 햇살 아래 검푸르게 펼쳐진 강진만과 아스라한 창선의 산들이 운치를 자아냈다.

저녁에 가도 좋기는 마찬가지다. 이 무렵이라면 주로 횟집에 들를 때가 많았다. 행사가 끝난 뒤거나 몇몇 친구들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곤 했다. 은은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시간은 금방 흘러간다.

그래도 최고의 추억은 으스름 저물녘 비 내릴 때 찾는 선소항이다. 희한한 것이 빗줄기는 눈에 거슬리는 많은 것들을 지워버리고, 또 보고 싶은 것들을 등장시킨다. 
언짢은 기억들이나 얼굴은 비가 씻어내고 그리운 사람은 빗방울이 무늬를 만들어 빚어낸다.

딸들이 남해로 내려왔을 때는 강아지까지 앞세워 넷이 바다 마실을 가기도 했다. 서울서 나고 자란 두 딸은 바다 구경을 자주 하지 못했다. 사방인 바다로 내려오니 모래사장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어깨싸움을 하면서 즐겁게 뛰놀았다. 

고현으로 옮긴 지금도 애들은 여수가 보이는 방파제까지 산책을 다닌다.

선소항은 그리 큰 항구는 아니다. 세상 기준으로 따지면 포구(浦口)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한때 선소항은 저 아래 미조항과 함께 남해를 기름지게 한 젓줄이었다. 남해에 다리가 없던 시절 여수에서 와 부산으로 떠나는 여객선이 얼굴을 들이밀어 대처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그뿐인가! 강진만은 맑은 바닷물과 드넓은 갯벌이 이어져 바지락 같은 어패류들이 사시장천 생산되었다고 한다. 거짓말을 보태 삽으로 뜨면 반이 조개류라고 했다. 그 많은 청정한 자연산 해산물은 대개 일본으로 수출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선소항에는 목에 힘깨나 주는 갑부들이 많았다고 한다.

남해읍 선소항, 유화, 90X80cm
남해읍 선소항, 유화, 90X80cm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던가? 

개들도 만 원권을 물고 다녔다고 했으니, 활수(滑手)하고 통 큰 사람들이 많아 거지들도 읍보다는 선소항으로 몰렸다는 말도 들었다.

물론 나는 그런 황금시절의 선소항을 만나지는 못했다. 지금 선소항에서 그 옛날의 부귀영화롭던 시절을 찾기는 어렵다. 

바다도 조금씩 오염되어 어획고도 예전만 못하고, 사람들도 많이 떠났다. 흥청거림은 남해의 다른 포구에 자리를 내줬다.

그래도 부자 망해도 삼대가 간다는 말처럼 선소항 사람들은 지금도 인심이 후하고 배짱도 좋다. 

포구 앞 정자에 기대 들락거리는 어선들을 지켜보는 노인 분들의 자세도 한결 느긋하고, 바다를 한 손에 움켜질 듯한 기개마저 느껴진다.

언제 가도 따뜻한 훈풍이 불어오는 선소항.
남해읍 사람들은 선소항이 있어 참으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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