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의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늘 만남을 통하여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햇빛과 달, 별과 바람, 공기와 물 등을 만나기도 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수많은 인연과 만남도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만남은 한시도 쉬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지만, 만남이 주는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고 있는가를 살펴본다면 여전히 미흡하기만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삶의 의미를 생존이라는 측면으로만 돌려버린 탓에 실체적 만남에 대한 의미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남은 사실 큰 나를 위한 배려입니다. 내 속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내 밖에서 만남이 성사되기도 합니다. 

만남의 연결 고리가 어떻든 사람, 물건, 동식물이나 가축, 자연환경, 무생물, 인위적인 모든 것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나의 밖으로 향하면서 이 순간에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 중심축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만남을 통하여 교감이 이루어지고 교감 속에서 일체가 하나로 통하는 지혜를 만끽할 수 있으니 만남은 단순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얼마 전 이루어진 친구와의 교우는 만남이 주는 의미를 일깨워 준 특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평소 안면이 있던 지인으로부터 오래된 가옥을 철거한 후 그냥 방치된 채 쌓여 있는 나무를 처분해 줄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지인의 제안에 어차피 버려진 나무라면 겨울 난로 땔감용으로나 아니면 각종 기구를 짤 때 받침대로 사용할 요령에서 흔쾌히 승낙하고 곧바로 현장으로 향하였습니다. 기대만큼이나 나무가 온전할까? 쓸만한 나무는 얼마나 될까? 이런저런 상념을 쫓으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만큼 나무에 대한 기대치를 높게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현장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지만 도착하여 바라본 나무는 쓸만한 게 과연 얼마나 있겠냐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대부분이 오래되어 퇴색된 나무 일색이었습니다. 여기에다 몇 달 동안 쌓여 있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는 탓에 실망감만 더할 뿐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일갈하기까지 합니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필자 역시 이런 경우라면 기왕 거기까지 갔으니 땔감용으로나 쓰려면 모를까 굳이 가져올 필요까지 있을까? 라며 부정적인 의사(意思)를 표합니다. 

하지만 필자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때의 그 벅찬 장면을 지금도 잊지 못하겠다며 상기된 표정을 짓습니다. 그가 집터를 돌아 나오려는 순간 쌓인 나무 중간에 그의 시선을 끄는 나무가 눈에 띄더라는 것입니다. 

생기기도 울퉁불퉁 한데다, 못이 여러 개 박혀 보기에도 흉측할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주변에 쌓여 있는 나무보다 더 볼품없는 나무여서 여간해서 시선을 끌기가 쉽지 않았던 터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그 나무에 시선이 가더라는 것입니다. 왜 저 나무에 시선이 갈까? 무엇 때문일까? 이런 의구심을 지닌 채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수십 개의 못이 박힌 그 사이로 드러난 하얀 속살이 그의 시선을 재차 이끌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깨끗하고 순수한지 잠시라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아니 겉은 이리도 못생겼는데 속은 어찌 이리 깨끗할까? 오랜 시간 쌓인 나뭇더미에 눌려 썩거나 각종 균 등이 침입하여 오염된 나무인데도 속살이 이리도 깨끗하다니 이건 예사 나무가 아니라고 짐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속살에 시선이 가는 순간 그래 이런 것을 두고 회자하는 말이 진흙탕 속에서 보배를 건진 것이요, 겉만 보고서는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스로 위안합니다. 나무에 박힌 못을 하나하나 빼고 난 후 오랜 시간 쌓인 흙먼지에다 갖가지 균류가 더덕더덕 붙어있는 상처 난 주위와 더럽혀진 곳곳을 말끔히 닦아내었습니다. 

잠시 후 깨끗이 다듬어진 나무의 자태가 어찌나 고운지 빛이 날 정도였다며 자찬하기까지 합니다. 

그의 자찬에는 흙탕물 속에서도 연꽃이 피어나듯 아름다움은 반드시 좋은 환경 속에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매 순간의 만남이 당장은 나와 무관한 듯하여도 그 연결망이 언제 어디서 나와 교우하여 행운으로 연결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 같았습니다. 

친구의 자찬이긴 하지만 그 내밀한 정서에는 하나의 작용은 계속 연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 여운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무는 집의 천장이나 기둥을 이루는 목재로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그 목재 덕으로 집안 뼈대가 형성되었을 것이고 이 집에서 살던 가족도 이 나무의 덕으로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만남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시각이라면 만남은 새로운 시작이요 생애 전체를 아우를 분기점이 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유추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남의 고리에서 어제 본 같은 꽃이라도 오늘은 또 다르게 느껴질 것이며, 어제 만난 인연일지라도 오늘은 더 새로운 모습으로 만나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저런 예를 들지 않더라도 오늘이 지나면 또 오늘이 오듯이 새로운 의식으로 맞이하는 기쁨, 새로운 느낌으로 맞이하는 감각, 새로운 마음으로 더해지는 설래임이 기대되는 만남이라면 그 의미가 오래도록 보존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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