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동 동천이 고향인 강인홍(83·사진) 향우는 우리나라 해양 수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남해인 중 한 사람이다. 

경남정치망수산업협동조합 제14대부터~17대까지 4선의 조합장을 지내며 17년 간 조합을 이끌고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하는 등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인물이었는데 그런 강 향우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둘째 형인 고(故) 강주홍 씨 꼽는다. 이유는 자신을 포함해 집안 형제, 조카들이 마음껏 학업에 정진하여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다할 수 있었던 건은 모두 둘째 형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 강주홍 씨는 10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삼동초교를 졸업하고 당시 5년제였던 경남중학교에 입학했지만 6·25 전쟁으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에 성공한 재일교포이다.

그는 살아생전에 항상 ‘부모형제는 잊어도 내 조국은 잊을 수가 없다’며 끝까지 귀화하지 않고 대한민국 국적을 고수할 만큼 애국심이 강했다고 한다.

또한, 모교인 삼동초교에 장학금 1억 원을, 6·25 전쟁이 아니었다면 학업을 마쳤을 경남고등학교에 5억 원을 희사하고 초대 안용백 초대교장 흉상을 제작해 기증했다.

자신은 가난 때문에 검찰총장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집안의 형제는 물론이고 조카가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으며 고향마을에 전기를 놓아주는 등 늘 주변을 살피고 돌봤다고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지난해 향년 90세로 일본에서 타계한 둘째 형의 서거 1주년을 기념하며 그의 일대기를 소개하는 글을 보내와 싣고자 한다.

다음은 고 강주홍 향우가 경남고등학교 재학생들 앞에서 강연한 내용의 일부이다.

저는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는 우등생으로 졸업했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정말 꿈조차 꾸지 못할 만큼 지독하게 가난했지요. 

저에게 주어진 길은 산비탈에 붙어 있는 다랭이 밭떼기나 갈고, 우리 집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소 한두 마리를 돌보는 어린 목동이 되는 것뿐이었습니다.

남해에 있는 농업학교나 수산중학교에 갈 수 없었던 가난뱅이가 부산에 있는 경남중학교에 다녔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워낙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졸라대니, 부모님은 남해에서도 산골 출신인 제가 시험을 쳐본들 틀림없이 떨어질 것이라고 여기시고 원 없이 시험이라도 치게 하자 생각하신 것이 내노라하는 부산, 경남 수재들이 경쟁하던 경남중학교에 응시하게 한 것인데, 덜컥 합격했습니다.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공부하겠다는 자식 때문에 얼마 되지도 않는 집안 살림은 거덜이 나고 말았습니다. 

밭도 팔고, 소도 팔고, 그러나 철없는 저는 부모님 등골이 얼마나 휘어지는지, 고향 식구들은 삼시 세끼 끼니는 제대로 차려 먹는지 알지도 못하고 경남중학교 쌍백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는 게 좋다고 우쭐했습니다.

입학금을 대느라고 집안 재산 다 털었으니까 학자금 조달은 제 몫이었습니다. 새벽 4시 하숙집을 나와 영도와 중구 일대에 신문을 배달하고 난 다음에 학교로 갔습니다. 그래서 항상 제가 1번으로 등교하고 2번은 경남중·고등학교 초대 교장이신 안용백 선생님이셨습니다. (중략)

누구나 한평생을 살다보면 여러 차례 고비를 겪기 마련입니다. 저 역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여러 번 겪었고, 그야말로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런 고비를 이겨낼 수 있느냐 없는냐가 인생을 좌우하겠지요. 

안용백 초대교장 흉상
안용백 초대교장 흉상

중학교 재학중에 6·25 전쟁이 터지고 학교는 군부대에 징발당하고 휴교를 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어 학교도 수업을 다시 시작했지만 휴교했던 기간의 월사금을 한꺼번에 다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저는 밀린 월사금을 구하지 못해 군수품 하역작업을 하는 막노동판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일본에 가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기술학교가 있다는 소릴 듣고 칠흙 같은 깜깜한 밤에 낚시배 같은 5톤 정도의 목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습니다. (중략)

막상 일본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일본도 전후 피해로 취업난에 실업자가 수두룩했습니다. ‘조센징’이라고 설움도 많이 당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기술을 배우고 공부도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하며 자전거 수리점, 영화관 등을 전전하며 일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1955년 삼지공업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드디어 학교에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야간부 3학년 때 아는 분의 소개로 오사카에 와서 플라스틱 분야의 기술을 익혔고, 그 덕분으로 결혼도 하고, 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지 어언 60여 년이 흘렸습니다.

지난 세월, 저는 나름대로 부모 형제의 사랑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저에게 꿈을 가지도록 가르쳐주신 모교와 은사님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조국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비록 훌륭하신 분들처럼 크게 할 수 없어도 내 능력껏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늘 생각하고 실행해 오고 있습니다. (중략)

제가 조국에서 이루지 못한 면학의 꿈을 이국땅 일본에서 펼쳐 보려고 밀항선을 탔던 그때 우리 국민소득은 55~6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이제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입니다. IT산업과 반도체는 물론 자동차와 한류문화까지 세계를 주름잡으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떨치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 주부들 사이에선 한국말 배우는 것이 유행입니다. 여러분이 펼쳐갈 시대는 한류가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는, 진실로 꿈과 희망을 펼칠 수 있는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꿈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여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힘 있는 나라가 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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