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에서 바라본 선소항
정자에서 바라본 선소항
항구 왼편에서 본 선소항. 하늘이 마냥 푸르다
항구 왼편에서 본 선소항. 하늘이 마냥 푸르다

2022년은 남해군 방문의 해다. 해저터널의 꿈에 부풀기도 하고, 선거철을 앞둔 축제가 온전하겠냐는 걱정도 있다. 한 해 잔치를 벌인다 해서 곳간이 두둑해질 리 없지만, 기왕 맞는 방문의 해니 성공의 문을 열어야 한다. 다들 유종의 미를 기대하며 여러 의견과 사업을 내놓는데, 섬의 고장 남해가 자랑할 만한 아름다운 꽃 가운데 ‘항구’도 빠질 수 없다. 통계에 따르면 남해에는 111개의 항구(또는 포구)가 있단다. 그 중 빼어난 풍경과 유구한 역사를 갖춘 항구들을 순례하면서 포구의 축제를 꿈꿔 보기로 한다.  <편집자 주>

선소항(船所港)은 읍에서 걸어도 30분, 자전거로는 15분, 차를 몰면 5분 거리에 있는 항구다. 김우영 선생님은 ‘선소(仙所)’로 불러도 좋을 만큼 신선이 터를 잡을 만한 아름다운 터전이라 극찬했다. 말 그대로 마음이 답답해서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싶다면 왕래의 불편 없이 선뜻 찾을 만한 명소다.

남해 대부분의 항구가 그렇듯 선소항도 규모로는 그리 크지 않다. 선착장에는 배가 30여 척만 들어와도 비좁을 정도다. 강진만의 배꼽쯤에 있어 큰 파랑이 일지 않아 피선(避船)할 일이 드무니 언제 가보아도 배는 항상 여유 있게 정박해 있다.

선소항이 언제부터 남해읍의 관문 노릇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읍성이 고현에 있었고, 강진만보다는 노량 바다가 가까웠으니 그리 큰 구실을 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하지만 세종 때 읍성이 옮겨온 뒤부터는 마실을 가듯 한걸음에 갈 만한 곳이 되었다.

남해로 오는 옛 사람들이야 얼추 노량 해협을 건넜겠지만. 무거운 짐이 있거나 사람이 많으면 선소로 들어오는 게 가뿐했을 법도 하다. 비가 오면 구성진 풍경에 시심(詩心)이 가슴을 울렸겠고, 맑은 날이면 푸른 하늘 아래 갈매기 소리를 들으며 탁주 한 잔에 창(唱) 한 자락 뽑아도 그만이려니 싶다. 또 남해 바다에서 지천으로 잡히는 고기를 횟감으로 삼아 풍류를 벗 삼아도 더할 나위 없겠다.

너무나 가까워서 뭐가 좋나 싶은 항구. 하지만 묵은 장맛처럼, 쓸쓸하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 언제나 친구처럼 사람들을 반기는 곳. 계절을 가리지 않고 쉬는 날 무료해지면 불쑥 찾아가도 손 내미는 연인. 그래서 신선 항구라 불려도 제 격이다.

역사의 여울 안에 남은 흔적들
고려시대 몽골이 침입했을 때 고현 일대에서 팔만대장경이 판각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 무렵 『삼국유사』를 편찬해 우리 옛 역사를 고스란히 전한 일연(一然) 선사도 정안(鄭晏)의 초청을 받아 대장경 판각에 참여했다.

스님은 판각 작업이 끝나고도 계속 남해에 머물러 『신편조동오위』란 책을 지었는데, 그때 머물던 곳이 선소 일대 어느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하여 ‘길상암(吉祥庵)’. 정확한 위치를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강진만 바다가 아스라이 보이는 어느 언덕에 길상암이 있었다 해도 무리는 없다.

세월이 흘러 나라가 바뀌고도 200년 뒤.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남해는 전쟁터였다. 마지막 해전이 노량에서 있었고,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왜군은 배를 버리고 내달려 닳은 곳이 선소였다. 포구가 있으니 달아날 배를 대기 좋았고, 언덕 위에 왜성(倭城)이 있어 거점으로 삼기에도 적당했다.

지금도 선소 마을 골목을 지나 뒤편 야트막한 야산에 오르면 왜성 성터의 흔적이 보인다. 이곳에서 왜군은 마지막 비명을 지르며 생명을 갈구했다. 이곳에 올라 바다를 굽어보면서 그 날 조선 군인과 백성들의 성난 함성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왜성을 내려와 ‘선소어촌계 특산물판매장’ 건물이 있는 골목 끝에 다다르면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세워진 마애비가 있다. <장량상동정마애비>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이 큰 돌덩어리에 새겨진 비석은 명나라 군대를 따라왔던 장량상(張良相)이라는 이가 왜군을 다 토벌한 뒤 기념해 세웠다.

원래 이 돌덩어리는 해변이 아니라 왜성이 있던 언덕에 있었는데, 2003년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덮쳤을 때 엄청난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미끄러져 지금 위치에 있게 되었다 한다. 구르지 않고 썰매를 타듯 활강했다니 신기하다.

이렇게 선소항은 남해 역사의 굵직한 한 자락을 차지한다.

번창한 항구에서 소박한 포구로
선소항이 지금 모습을 갖춘 때는 1929년경이다. 마을 앞에 있는 <선소축항기념비>에 자세하다. 한때는 많은 어획고를 올려 말 그대로 “개도 만원권을 물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황금시대가 조금 물러갔지만, 대신 한적한 어항의 고즈넉함을 얻었다.

항구 앞에 세운 정자에 앉아 풍광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도 좋고, 항구를 중심으로 양쪽 끝자락에 자리한 횟집에 들어가 미각을 즐겨도 그만이다. 오른쪽 끝에는 ‘선소횟집’(☎864-2077)이 있고, 마애비가 있는 골목 끝에는 ‘선소새횟집’(☎864-2857)이 있으니, 내키는 대로 골라 들어가면 된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강진만을 가로질러 삐죽 튀어나간 방파제를 거닐면서 물고기들과 인사를 나눠도 신선의 정취가 넘쳐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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