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정을병
작가 정을병

기자의 고등학교 시절 얘기부터 꺼내야겠다. 기자는 중학교 때부터 미래의 꿈이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학교 공부는 관심 밖이었고, 오로지 소설을 읽는 데만 골몰했다. 소설이라면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학생 형편에 번듯한 단행본 소설을 읽을 처지는 못 됐다. 도서관에 가 빌리겠다는 생각은 못하고, 방법을 찾다 문고판이 눈에 띠었다.

기자의 학창 시절 때 대표적인 문고판은 ‘삼중당문고’였다. 당시 이미 300권을 넘겼던 삼중당문고는 기자에게 소설의 엘도라도였다. 동서양 대표 작가들의 장편들과 단편선집이 수두룩했다. 이 문고본을 통해 기자는 김이석이나 조해일, 최인훈 등의 작가들을 새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기자를 사로잡은 작가는 정을병(鄭乙炳)이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기자는 정을병의 작품을 꾸준히 읽었다. 워낙 다작하는 작가라 다 읽을 엄두는 내지 못해 제목이 흥미로운 것부터 읽었다. 그의 소설 제목은 사실 꽤나 독특했다. 그러다 대학원에 들어가 고전문학을 전공으로 택하면서 정을병은 기억에서 차츰 지워졌다.

남해로 내려왔을 때 정을병은 이미 고인이 된 뒤였다. 한문 문적이나 뒤적이고 소설 쓰기에 골몰했던 기자는 그가 세상을 떠난 사실도 몰랐다.

그러다 우연히 젊은 시절 감탄과 질투로 가슴 조이며 읽었던 정을병을 다시 만났다. 누군가로부터 그가 남해 출신이라는 말을 듣자 가슴에 묻혔던 ‘정을병’이 되살아났다.

이곳 남해가 바로 ‘그’가 작가로서의 숨결을 시작한 곳이었구나!

이동면 용소마을 벅시골 전경. 이곳에서 정을병은 태어났다. 마을 어르신에게 물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분은 없었다. 누군가 지금은 생가도 없어졌다고 전했다
이동면 용소마을 벅시골 전경. 이곳에서 정을병은 태어났다. 마을 어르신에게 물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분은 없었다. 누군가 지금은 생가도 없어졌다고 전했다

다시 기억 속으로 스며든 정을병
정을병은 1934년 7월 5일 남해군 이동면 용소마을 벅시골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晉陽)이고, 호는 난정(蘭丁) 또는 일민(逸民)이었다. 1956년 한국신학대학교에 입학해 공부했다. 신학대학을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문학이 내포할 비범한 일면을 암시하는 일이다.

작가로서 정을병은 1959년 『자유공론』에 단편 <철조망>과 <의지>를 발표해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선보였다가 1962년 『현대문학』에 단편 <부도(不渡)>와 <반(反)모랄>이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그는 평생 대단히 많은 책을 출간했다. 주요작품만도 『개새끼들』(1966)을 비롯해 『유의촌(有醫村)』(1968), 『아테나이의 비명(碑銘)』(1968), 『말세론(末世論)』(1968), 『받아들인다는 문제』(1970), 『도피여행』(1971), 『피임사회』(1972) 등이 있다.

2003년 『정을병문학선집』(국학자료원 간)이 8권으로 발간되었는데, 이 선집만 읽어도 정을병 소설의 정수는 맛본 셈이다.

정을병의 문학 세계는 ‘고발문학’이라는 말로 집약된다. 본인의 술회도 있지만, 그는 체험하지 않고는 표현하지 못하는, 체험이 창작의 밑거름이 된 작가다. 어떤 작가든 체험 없는 문학이란 있을 수 없지만, 정을병의 체험은 농도가 사뭇 다르다. 단지 세상 경험이라는 물질적인 울타리를 넘어서 정신적, 이념적, 원초적 고민과 대안에 대한 사유까지도 그에게는 체험이었다.

고발문학이란 무엇인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관해 그 불화(不和)의 원인을 낱낱이 드러내 폭로하는 것을 일컫는다.

정을병문학선집 8권, 화전도서관에 있다
정을병문학선집 8권, 화전도서관에 있다

고발을 하고 고발을 당하며 산 일생
이런 고발문학의 정수가 단편 <육조지>다. 1974년 발표된 이 작품에서 정을병은 당시의 풍속 세태를 교도소(일명 감빵)에 들어간 한 죄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웃지 못할 상황으로 재현해서 신랄하게 폭로했다.

“순사는 때려 조지고…, 간수는 세어 조지고…,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늘여 조지고…, 도둑놈은 먹어 조지고…, 마누라는 팔아 조지고…”라는 블랙 코미디적 선언을 통해 정을병은 우리나라 법체계의 모순과 동맥경화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부조리와 부패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실존적인 문제를 세상 사람들을 향해 던졌다.

1966년 9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중편소설 <까토의 자유>는 고대 로마 시대의 부패상과 허위의식을 폭로하면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근원적 진리를 ‘까토’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에 견주어 갈파했다. 이 작품은 고대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현재성을 띠고 있다. 3공화국 때 독재자 박정희가 자신의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독선적이고 위선적으로 행동했던, 부패한 실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실과 상상이 교묘하게 직조되어 있는 이런 작품은 문체와 구성이 펄펄 끓어 지금 읽어도 생동감이 넘친다. 그릇된 현실을 어떻게 간파해야 하는지 암시를 던진다. 박정희 독재의 서슬이 시퍼런 때 이런 풍자와 야유를 구사할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았다.

정을병은 2009년 2월 18일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다른 일로도 세간에 알려졌다. 1974년에는 정권에 밉보여 ‘문인간첩단 사건’의 공범으로 잡혀 들어갔다가 재판 끝에 무죄로 풀려났다. 또 2005년에는 문인들에게 지급될 정부보조금 수억 원을 횡령했다 해서 법정에 서 10개월형을 구형받았다. 다행히 여직원의 범행임이 밝혀졌지만, 이로 인해 그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얼마 뒤 죽었다.

그러나 이런 일보다 남해사람으로서는 어느 월간지에 그가 남해 사람을 두고 쓴 글을 잊지 못할 듯하다. 기자가 들은 바로는 남해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아직도 정을병은 남해에서 잠들지 못하고 있다. 그의 문학비는 남해에 세워지지 못했고, 2016년 그가 45년 동안 살았다는 서울 서대문구 안산공원 느티나무길 입구에 들어섰다.

기자는 비록 김만중문학상 대상을 받아 남해에 살게 되었지만, 남해에 ‘정을병문학상’이 제정되기를 바란다. 김만중만큼이나 선이 굵고 기억되어 마땅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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