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전 국회의장
박희태 전 국회의장

박희태(84) 전 국회의장은 이름만 들어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정치인이다. 국회의원(6선), 원내대표, 법사위원장, 법무부장관, 당대표, 국회부의장, 국회의장을 모두 거쳤다. 18대 국회를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정치원로로 여야에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초청으로 지난 7월 식사를 함께하며 나눈 이야기를 풀어본다.

‘남해사람’하면 60대 이상의 우리 국민들은 대부분 ‘박희태 의장’을 떠올린다. 그의 이름이 남해인의 상징처럼 된 것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여의도에 입성한 후 2016년경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은퇴하기까지 30년 가까운 세월을 정치뉴스의 한가운데 선 정치인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특히 당 대변인과 당대표, 국회의장을 지내던 시절에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뉴스거리였다.

그랬던 그도 요즘은 화려한 정치이력과 부담감을 내려놓고 고향후배들의 든든한 선배로, 30년간 묵묵히 뒷바라지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으로, 또 어릴 적 추억을 공유하는 고향 친구들의 벗으로 돌아왔다. 지금 시점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정치적으로 이해관계가 사라진 그의 진솔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함이다.

박 전 의장이 정치에서 이름을 날린 것은 초선의원 시절인 1988년 당시 집권당이던 민정당 대변인으로 활약하면서다. 4년 3개월 동안 대변인을 하면서 명 대변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치현안에 대한 그의 논평은 격조와 품위가 있었고, 고사성어를 적절하게 구사하거나 상황에 걸맞은 비유로 상대의 허를 찔렀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신조어도 남겼다. 요즘 널리 쓰이는 ‘내로남불’이나 ‘총체적 난국’ 같은 용어가 그것이다. 이때의 활약은 지금도 회자되며 각 정당의 대변인들이 그를 ‘명대변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는 이동초와 남해중학교를 거쳐 부산의 경남고와 서울법대에 진학했다.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 검사로 승승장구하며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을 비롯해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 춘천지검장, 대전지검장, 부산지검장, 부산고검장 등 요직을 맡았다. 특히 춘천지검장 시절 폭탄주를 고안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의 정치입문은 스스로 원한 건 아니었다. 박 전 의장은 “지금도 기억한다”며 당시(1988년)를 회고했다.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서울로 부르더라고. 4월 총선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공천을 받으라는 거야. 나는 돈도 없고, 조직도 없어 못한다고 했는데 당에서 다 지원해준다고 결정을 하라고 압박을 하는거야.”

제안을 받고 가족들과 밤새 가족회의를 했다. 20년 이상 몸담은 검찰조직을 떠나는 걸 단 하루 만에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는 결정이었다. 아내 김행자씨가 “운명이다. 그쪽 뜻을 따르라”고 했다고 한다. 박 전 의장은 “아내가 결단력 있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한마디가 결국 내 운명을 바꿨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아내와 가족의 지지에 큰 용기를 얻어 출마했고, 선거운동 20일 만에 당선됐다. 이후 6선으로 국회의원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아내의 결단을 잊지 않았고, 남해와 하동, 양산의 유권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집권여당의 초선 의원으로 1988년 13대 국회에 입성한 그에게 떨어진 첫 역할은 국회법 정비였다. 13대 총선에 앞서, 1987년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직선제를 도입해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았는데, 그전까지 국회는 행정부의 거수기에 불과했다. 국회가 제 역할을 하려면 국회법 정비가 급선무였던 것이다. 그는 국회법 입법 소위원회에서 당시 야당 소속이던 박상천 의원과 때론 싸우고 때론 협의하면서 국회법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비교적 합리적이었던 박희태 의원이 국회 출입기자들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정치적 입지를 바꿔놓았다. 바로 당 대변인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의 기억은 이렇다.

“당에서 대변인을 뽑는데 내 이름이 후보자에 들어가 있어. 당시 대변인은 적어도 재선 아니면 3선 정도 해야 맡을 수 있는 당직인데 초선인 내 이름이 있어서 이유를 물었더니 ‘기자실 추천’이라고 하더라.”

초선 박희태 의원은 기자들 추천(?)을 받아 국회 역사상 가장 긴 4년 1개월의 여당 대변인을 맡게 됐다. 초선인데도 원내부총무에 이어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대변인이 되었다. 박 전 의장 본인은 “기자들이 잘 봐줘서 그렇지 뭐”라고 스스로 낮추지만 그만큼 핵심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논평이 그 자리를 가져다준 것이다.

기자들 추천 대변인은 그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그의 입에서 탄생한 유행어가 ‘내로남불’로,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을 담고 지금까지도 정치논평의 단골메뉴가 돼 있다. ‘내로남불’은 지난해 4월 뉴욕타임즈가 한국 총선결과를 전하는 뉴스에 ‘naeronambul’이라는 영어단어로 등장할 정도다. 현실을 반영하는 일상적인 용어가 된 것이다.

박 전 의장은 “웃음꽃 피는 정치, 그래서 국민이 사랑하는 정치가 되길 바라는 뜻에서 짧은 말 긴 여운을 가진 ‘유머와 위트’를 고민했다”며 “이것은 나를 살찌게 하고 상대를 즐겁게 하며 세상을 밝게 하는 좋은 길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군향우회 60년 회갑 고문단 초청
군향우회 60년 회갑 고문단 초청

박 전 의장의 좌우명은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가장 착한 것은 마치 물과 같다는 뜻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하는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선의 표본이라는 말이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과 가까운 친구의 말을 빌리면 그는 남을 비방하거나 남을 헐뜯는 소리를 결코 하지 않고 남의 장점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런 그의 마음씨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그의 편으로 끌어 모우는 힘이 됐을 것이다. 그가 또 즐겨 쓰는 말로 ‘유능제강(柔能制剛)’도 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뜻으로, 오히려 강한 카리스마가 소통을 막을 수 있다는 자기통제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무슨 능력으로만 당 대표를 두 번씩이나 하고, 국회의장을 하고, 검찰의 최고인 법무부장관을 하고, 국회의원을 6번이나 했겠나? 다 강함을 이기는 유연함이 있어 조직에서 최고봉에 오르지 않았겠나”라며 웃었다.

박 전 의장은 1938년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에서 태어났다. 이동면 정거리 양복점 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선친의 본가는 남면이었다. 남면에서 이동면 정거리로 이사를 온 것은 박 전 의장이 태어나기 직전이었다.

박 전 의장은 국회의장 취임사에서 “여러 가지 험로가 있을 때마다 오랜 의정 경험을 통해서 터득한 노마지지(老馬之智)를 발휘해 방향을 제시하고 굳건히 나아가도록 하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 특별한 욕심은 없다. 정치인들은 국민 앞에 정쟁이 아닌 정책으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정치인 스스로의 각성도 중요하지만, 언론과 국민들이 도와주어야 한다. 잘하는 정치인은 서로 격려하고 영웅처럼 만들어줘야 한다. 영웅은 또 다른 영웅을 낳는 법이다. 그게 여론의 힘이다. 아무리 정치9단이라도 민심 앞에선 초급자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박 전 의장은 영국의 작가 조지 무어의 말을 인용하며 고향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조지 무어는 “사람은 필요한 것을 찾아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고향에 와서 그것을 발견한다”고 했다. “우리 향우들도 고향에 가면 잊었던 추억을 재발견하고 그리운 사람과 아름다운 고향에서 재충전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준 고마운 고향 남해를 위해 힘과 마음을 합치자”자는 말이다.

박 전 의장의 근황은 요즘 흔한 말로 ‘가정적’이다. 여기에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공존한다. 그는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아내가 문전옥답을 이뤘다. 요즘 감사하면서 아내와 드라이브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 일찍 추억이 깃든 장소로 드라이브를 가서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소문난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온다. 오후는 함께 가벼운 운동을 하는데 얼마 전까지는 근육운동도 했는데, 요즘은 걷는 유산소 운동만 한다”고 말했다.

여섯 번의 총선과 크고 작은 당내 선거에서 정치인의 아내로 묵묵히 역할을 감당해 준 아내 김행자씨와 하루를 시작하는 드라이브는 아내의 치료에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박 전 의장 자신에게도 좋은 시간이라고 한다.

또 한 달에 두어 번은 남해중학교 동창모임인 ‘삼우회’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진다. 폭탄주 원조답게 여전히 한 자리에서 10여 잔의 폭탄주를 즐길 정도다. 더불어 후배들의 집안 대소사나 애경사도 꼭 챙긴다.

지난 6월 열린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예비후보 출판기념회에도 직접 참석해 응원했고, 하영제, 박성중 국회의원에게도 아낌없는 격려와 용기를 보내고 있다. 정당을 떠나 도전하는 후배라면 지지하고 격려해야 한다는 마음에서다. 박 전 의장은 “이제는 후배들이 남해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능력 있는 후배, 고향을 사랑하며 헌신하는 후배들이 자랑스럽고 고맙다”고 말한다.

박 전 의장의 업적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남해 출신 ‘6선 국회의원’, ‘국회의장’, 남해도립대, 창선삼천포연륙교 등의 단어와 함께 남해인에게 기억된다. 여기에 최근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한 남해-여수 해저터널까지 그의 노력과 공이 담겨있으니 그 스스로 고향에 노마지지(老馬之智)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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