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종 욱 작가
임 종 욱 작가

남해에는 법정리가 79개, 행정리로 221개 마을이 있다고 한다. 행정리가 이장이 있는 곳이니, 우리 군 조직에서 실핏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부락은 훨씬 많다고 하는데,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은 듯하다.

우리 삶의 가장 작은 공동체인 이(里)는 조선시대 때부터 쓰였다. 남해를 그린 고지도에 보면 율내리(栗乃里) 대사동(大寺洞)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대사동이 지금의 고현면 대사마을을 가리킨다면, 그 일대가 율내리로 불렸던 모양이다.

나는 1962년에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에서 태어났다. 안타깝게도 나는 내가 태어난 마을에 대해서는 아무 기억도 없다. 철들고 난 뒤에는 가본 적도 없다. 오히려 내 머릿속에는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살던 문경군 동로면 일대가 더 훤하다. 당장 던져진데도 눈 감고도 내가 살던 집을 찾아갈 자신이 있다.

내 탯줄이 묻힌 마을은 아득히 멀고, 지금 내 호흡이 들고나는 곳은 남해다.

남해에서 내가 살던 마을은 몇 군데였을까? 삼동 물건마을, 읍내 북변마을, 설천 금음마을, 그리고 고현 탑동(정확히는 중앙동). 모두 청포도알 같은 추억과 사연들이 알알이 맺힌 동네다.

남해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다들 태어난 마을에 대해 말한다.

서면 금곡마을 / 아크릴화 / 65X50cm
서면 금곡마을 / 아크릴화 / 65X50cm

마을의 불알친구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건강하신 부모님들, 이웃사람들과 어르신들, 후배와 자식들, 심지어 멍멍이까지 그들의 삶에서 태어난 마을이 얼마나 큰 활력소인지 실감하게 된다. 그들의 삶은 마을에서 시작했다가 지금도 이어지고, 또 휴식을 취할 것이다.

내게는 아직 남해에 이렇게 말할 마을은 없다. 가장 오래 살고 있는 탑동마을이 나중에 그런 구실을 했으면 바라지만, 첫 기저귀를 찼던 사람들과 같은 끈끈한 유대감이 뿌리내릴지는 알 수 없다.

서면 금곡마을은 내가 살아본 동네는 아니다. 아니 인연이 닿았으면 살 뻔했다. 탑동에 오기 전 여기저기 이사할 곳을 찾는데, 지금은 남해군의회 전문위원으로 있는 심재복 선생이 이 마을을 소개했다. 여건이 맞지 않아 뜻은 접었지만, 그때도 금곡마을은 이른 바 배산임수(背山臨水)가 말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한동안 잊혔다가 작년 가을 무렵 다시 찾았다. 지난 해 나는 유배문학관에서 상주 작가로 9개 월 정도 머물렀다. 그때 소속부서가 문화관광과였는데, 마침 심재복 선생이 과장으로 부임했다. 이따금 문학관도 찾았는데, 그때 나는 심심파적으로 그림이란 것을 끄적였다.

내 그림을 보더니 자기 고향마을을 그려달라는, 나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부탁을 했다. 크게 작게 도움을 받은 처지라, 언감생심이지만 작은 보답이라 여겨 금곡마을을 찾았다.

남산(208미터)과 옥기산(251미터)을 좌청룡 우백호로 거느리고, 앞으로는 제법 너른 논밭이 펼쳐졌고, 논밭 사이 서상천이 느긋이 흘렀다. 큰 인물이 나오고 무병장수할 명당이었다. 

작년 12월 말 근무 기간이 끝날 무렵 그림도 완성(?)되었고, 마침 심재복 과장님이 오셨기에 그림을 전했다.

쑥스럽기는 서로가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로서는 아주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누구에게나 고향 마을은 소중하다. 때로 침을 뱉고 돌아서도 결국은 다시 찾는 우물이다. 그런 마을을 가진 사람들이 한없이 부럽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