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곡사, 남해에서 솟은 학문의 샘 세상을 적시다
운곡사, 남해에서 솟은 학문의 샘 세상을 적시다
  • 임종욱 인턴기자
  • 승인 2021.07.29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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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사우(祠宇)를 찾아서 (5)
운곡사보존회 정경남 회장(왼쪽)과 정태우 총무
운곡사보존회 정경남 회장(왼쪽)과 정태우 총무
운곡사 전경
운곡사 전경
당곡정선생실기
당곡정선생실기

운곡사(雲谷祠)는 서면 중현리 1024번지(화방로 550-20), 도산마을에서 회룡마을로 가는 도로 중간 쯤 오른편 샛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나온다. 이 일대는 바다까지 상당히 깊고 긴 골짜기가 이어져 차를 몰고 지나가도 절경을 맛볼 수 있고, 걸어가면 굽이굽이 이어지는 감흥을 챙길 수 있다.

운곡사는 1853년 운곡정사(雲谷精舍)란 이름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남해가 낳은 유학자 당곡(唐谷) 정희보(鄭希輔, 1488~1547) 선생의 위패를 모신다. 당곡 선생은 1831년 함양에 있는 당주사(溏州祠)에 처음 모셔졌다가 운곡정사가 세워지면서 제자인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과 함께 배향되었는데, 노진의 위패는 1975년 남원의 창주서원으로 옮겨졌다.

운곡정사는 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으로 잠시 위축되었지만, 남해의 선비와 후손들이 뜻을 모아 1874년 중창했다. 그러다 1916년 재건해 지금의 모습을 얼추 갖추었고, 이름도 ‘운곡사’로 바뀌었다. 이후 여러 건물을 지어 사우의 면모를 어엿하게 일신시켰다.

운곡사는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되어 당곡 선생의 유업과 사상을 기리는 데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운곡사가 있는 중현마을은 진양정씨의 집성촌이다. 그래서 마을 분들에게 운곡사는 더욱 소중하다.

절도에서 피어난 유림(儒林)의 꽃
당곡 정희보 선생은 1488년 남해군 이동면 초곡리 자택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월일은 알 수 없다. 본관은 진양이고, 자는 중유(仲猷)며, 호는 당곡을 썼다. 아버지의 함자는 효충(孝忠)이고, 할아버지의 함자는 확(確)인데, 할아버지께서 현신교위(顯信校尉)로 계시다가 남해로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해주정씨다.

얼마 뒤 선생은 아버지를 따라 함양으로 옮겨 살았다. 가학을 이어받아 일찍부터 성정이 남달랐고 학문에 천착해 나라의 기둥이 될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한 뒤 나라의 정치가 어지럽고 사림(士林)들의 환란이 극심해지자 관직의 뜻을 접고 함양 당곡에 은거한 채 학문을 함양했다.

재야의 학자로 평생을 살 결심이었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가 숨겨질 수 없듯 선생의 학문과 덕망은 고을을 넘어 널리 알려져 많은 인재들이 선생을 찾아 배웠다.

이에 살던 곳에 작은 서재를 짓고 날마다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니, 호남과 영남 각처에서 선비들이 찾아와 성황을 이루었다. 선생은 제자의 기량과 품성에 따라 알맞은 방법으로 지도해 모두 인재로 성장시켰다. 

선생의 학문이 얼마나 호한하고 심오했는가는 제자들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다. <당곡정선생실기>에 실린 ‘문인록(門人錄)’에 보면 15명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함께 배향되었던 노진(이조판서)을 비롯해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1520~1578, 호조판서), 구졸(九拙) 양희(梁喜, 1515~1580, 장례원판결사), 개암(介庵) 강익(姜翼, 1523~1567, 소격서참봉), 덕계(德溪) 오건(吳健, 1521~1574, 이조정랑), 양곡(暘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 병조판서) 등이 눈에 띤다. 모두 당대의 쟁쟁한 문사요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이처럼 후학을 기르면서 학문에 전념하던 당곡 선생은 1457년 5월 15일 6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묘소는 함양 사근(沙斤) 북쪽 언덕 성황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남해의 긍지, 함양의 자랑
한낮의 불볕더위가 뜨거운 오후, 운곡사 앞 주차장에서 운곡사보존회 정경남 회장과 정태우 총무를 만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모두 선생의 후손이다. 코로나 때문에 이 즈음 방문객이 뜸한지 사우 안은 잡초가 무성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정경남 회장은 보존회 회원은 30여 명 되는데, 올해 4월 16일 제례 때는 동네 분들만 참석하는 등 조촐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남해의 유학을 가름했던 큰 인물인데, 후손으로서 선생을 널리 선양하지 못하는 것이 죄스럽다며 아쉬워했다. 군청에서도 행사나 필요할 때면 지원이 있지만, 성역화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며 행정이나 군민들의 호응이 좀 더 커졌으면 하고 바랬다.

정태우 총무도, 선생은 글을 자랑으로 삼지 않으셔서 <실기>에 실린 작품이 전부라면서 책자를 건넸다. <실기>에는 시 6수와 부(賦) 1수, 잡저(雜著) 16편, 총론 15편, 찬문 1편이 실려 있었다. 양은 적었지만, 선생의 심성과 학문을 되새길 수 있어 느낌이 새로웠다. 번역은 되었다고 하는데, 다시 번역하든가 옛 책이라도 손쉽게 접할 수 있어 군민들의 교양서가 되었으면 싶었다.

두 분과 인사를 나누고 떠나면서 고개를 돌려 운곡사를 다시 살폈다. 북향에 자리했지만, 산기슭 경사가 완만해 한여름 햇살이 눈부셨다. 항상 선생의 학문과 학덕도 저 햇빛처럼 찬란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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