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사석비군
무민사석비군
가선대부행첨사김후계홍청백선정비
가선대부행첨사김후계홍청백선정비
자헌대부행첨절제사지공홍관영세불망비
자헌대부행첨절제사지공홍관영세불망비
증병조참의최공사적비
증병조참의최공사적비

미조는 오래 전부터 군항(軍港)으로 국토의 남단을 지키는 첨병으로서 구실을 다해왔다. 전란이 일어날 때면 위란의 현장으로 달려가 신명을 다했고, 수많은 수군과 장령들의 숭고한 땀과 피가 곳곳에 어려 있다.

이런 점에서 미조는 호국의 현장이자 국토 수호의 파수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역사의 맥락은 미조면에 남은 금석문의 흔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조항에 들어서면 고려 말기 왜구를 섬멸했던 최영 장군을 모신 무민사를 참배하게 된다. 무민사 안에는 미조에 근무했던 일곱 분의 선정비, 불망비 등이 모여 있다.

그러나 기왕 답사의 여정을 잡았다면 좀 더 먼 곳에서 출발해 발걸음을 옮기는 편이 좋다. 미조면의 금석문은 대개 도로 가까이 이어져 있어 하이킹을 하듯 걸으며 탐방해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선정을 베풀고 적군을 물리친 두 첨사
송남마을 도로변 송정해수욕장 입구에서 미조 방향으로 30미터 쯤 가면 왼쪽 언덕에 마애비로 된 <가선대부행첨사김후계홍청백선정비>를 만나게 된다. 마애란 바위를 갈아 글을 새겨 넣었다는 뜻이다.

이 선정비는 1853년 2월에 고을 사람들이 세웠는데, 스스로 근검함으로 모범을 보이며 백성들을 돌보았던 첨사 김계홍(金啓泓)의 덕망과 인품을 기렸다. 길가에 인접해 있으니 해수욕을 즐겼다가 미조로 걸어갈 때 들릴 만하다.

이 비석은 최근에 발견되었다. 기자는 2014년 남해에 있는 금석문을 찾아 채록하고 번역한 『남해금석문총람』(남해문화원)을 간행했는데, 그때 금석문을 찾고자 남해를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차를 타고 이 앞을 지나는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덩굴과 나뭇잎이 무성한 바위에 뭔가가 있을 듯했다. 차를 돌려 올라가 덩굴을 걷어내자 마애선정비가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심해에서 금은보화가 가득한 난파선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여러 해가 지나 버스를 타고 지나오는데, 여전히 수풀이 우거져 바위는 눈에 띠지 않았다. 지금도 꿋꿋한 모습 그대로 목민관의 자세를 대변하길 바란다.

송정마을을 지나 20분 쯤 걸으면 초전삼거리가 나온다. 바로 가면 미조고 왼쪽으로 꺾으면 독일마을이 있다. 이 삼거리 오른편 숲에 작은 쉼터가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자헌대부행첨절제사지공홍관영세불망비>가 다소곳이 서 있다.

1871년 1월 마을 백성이 세운, 첨사 지홍관(池弘寬)의 선정을 노래한 비다. “힘으로 서양 세력을 평정했다(武平西洋)”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해 봄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한 신미양요가 터졌다. 남해에서도 그 전조가 있었던 것일까?

무민사석비군과 최헐 장군의 사적비
무민사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에 7개의 석비가 나란히 서 있다. 무민사보존회 천금종 회장님 말에 따르면 중건할 때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석비는 시간도 오래 되었지만 한데 나와 있어 마모가 심한 편이다. 그래서 글자가 제대로 판독 안 되는 것도 있다.

맨 앞줄에 <가선대부행첨사김공춘복영세불망비>(1843년 건립)가 섰고, 이어 <전첨사김공우고선정비>(1589년), <행첨사장공문○선정비>(1874년), <행첨사이공중길○○○○○>(미상), <통정대부돈녕도정권공선복불망비>(1895년), <절충장군행첨절제사권공희학불망비>(1893년 개수), <절충장군첨사최공종림거사비>(미상)가 줄지어 자리했다.

석비의 주인공들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다양하다. 미조진항의 연혁을 겹쳐보며 국토 수호의 정신을 되새겨도 좋을 것이다.

무민사에서 비탈길을 내려와 미조항 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천연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된 상록수림이 나오는데, 그 길가에 <증병조참의최공사적비>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비석은 1965년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노량의 당포에서 순국한 최헐(崔歇, 1564-1598[1599]) 장군의 충정을 기린다. 36살 젊은 나이로 전사한 최헐 장군은 묘소도 미조면에 있다. 최헐은 최영 장군, 성윤문 장군과 함께 무민사에 봉안된 세 분 장군 중 한 분이다. 장군의 11세손 최영수 님이 비석을 세우고, 무민사에 부탁해 1969년부터 함께 봉안했다고 한다.

이처럼 미조면 도로를 따라 걸으며 찾아본 금석문들은 미조진항에 근무했던 장령들의 공훈을 선양한 비석들이다. 비석에 새겨진 구절대로 이 분들은 모두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을 자식처럼 돌봤을 것임에 틀림없다. 어쨌거나 비석을 세운 미조 백성들은 그들을 다스리는 관리들이 올바른 정치를 펼쳐 태평성대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오늘날의 위정자들은 억강부약은 외면한 채 자신의 이익에만 눈멀어 있는 것은 아닌지 되새기며 탐방길을 걸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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