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임 종 욱
작가 임 종 욱

누구나 높은 곳에 오르고 싶어 한다. 그곳에 가면 뭔가를 찾을 수 있다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다에서 밀려오는 폭풍과 해일, 거센 파도가 두려워질 때면 사람들은 낮은 땅을 떠나 더 높은 곳에서 안전을 찾는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수백 미터 높이의 피라미드를 쌓아 영생을 희구했다. 어떤 이들은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도전했다. 동양에서는 주로 땅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들은 수만 명의 피와 땀을 희생해 헛된 망상을 이루려고 발버둥을 쳤다. 뭔가를 얻으려고 남들을 죽음과 암흑으로 몰아세웠지만,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럴 듯한 변명이 있다. 자신의 선의를 포장하고 남들이 쳐놓은 악의에 호도 당했다고 외친다. 가증스럽게도 이를 남들이 귀담아듣는다고 자위한다. 가공할 합리화의 말부림이다.

부대낌이 힘겨워질 때 우리는 땅을 밟아 산을 오른다.

남해에도 오를 만한 명산이 많지만, 금산은 그 중에서도 남다르다. 바다에서 보면 금산은 아스라이 기기묘묘한 암석을 머리에 인 채 장엄하고, 뭍에서 보면 푸른 산맥을 차곡차곡 개켜 올려 녹음을 자랑한다.

금산 보리암 / 아크릴화 / 33X45cm
금산 보리암 / 아크릴화 / 33X45cm

어떻게 그 산에 오르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남해에 왔을 때 처음 찾은 곳도 금산이었다. 한여름 숨을 헐떡이며 바위를 밟았고, 끝없이 쌓인 돌덩이의 시원한 감촉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이따금 숨을 가누다가 돌아본 남해의 푸른 바다는 자연이 빚은 거대한 수영장이었다. 뛰어들어 헤엄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외지에서 손님이 왔을 때도 그들은 항상 금산을 보고 싶어 했다. 턱밑까지 도로가 나 있어 산행의 즐거움은 줄어들어도, 정상에 이르러 만끽하는 감동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때로는 치오르는 운무(雲霧)가 우리를 하늘로 밀어올리고, 때로는 소슬한 빗방울이 우리를 하심(下心)하라며 가라앉힌다.

걸음마다 달라지는 돌의 배역들에 맞춰 사람들은 동화 같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새겨 넣었다. 단군왕검이 세상의 시원을 보여주고, 태조 이성계는 나라의 열림을 기다리며, 태자 부소는 왕조의 흥망에 애달파한다. 바위가 들려주는 갖가지 사연들이 바람을 따라 비산하고, 감흥과 상상은 바다를 타면서 춤과 노래로 변주된다.

그리고 금산에는 보리암이 있다. 보리의 세상에 들어 세속의 욕망을 털어버리고 정각(正覺)의 지혜를 채우라고 넌지시 권한다. 이끼 낀 바위 골 너머 떠가는 흰 구름과 바위를 둘러 노란 햇빛에 물든 하늘. 사람의 세상이 저만치 물러난다.

잠시 옷깃을 여미며 걷다가 만나는 해수관음보살상. 그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는 이들에게 하얀 보살상은 나에게 절하지 말고 저 바다를 굽어보라고 일러준다. 소망이란 움켜쥐면 다 흘러버리는 바닷물 같다고 일깨운다.

금산에서의 하루는 오롯이 나를 버리는 시간이다. 나를 버려야만 찾을 수 있는 나. 세상의 모든 민물을 껴안지만 다시 세상으로 돌려주는 바다. 바다는 이치를 거스르지 않아 참 바다가 된다.
금산에 올라 바다가 갈무려 둔 ‘참 나’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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