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조성모 님이 부른 <가시나무 새>에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이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이 없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노래 가사는 떠오르는 갖가지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잠시라도 놓아두지 않는 데 대한 격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사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생각들로 인해 마음이 편안해지지 못하는 경우는 누구나 예외 없이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처럼 복잡한 생각들로 인해 자신의 진면모를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힐링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만 생각에서 기인된 욕망을 다스리거나 이완시키는 일은 정신 건강과도 직결되는 사안이기에 이를 치유할 방편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복잡해진 사회구조는 더 많은 생각을 지니게 하고 심지어는 욕망의 사슬에 묶이게도 하는 것이 오늘의 형국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직면할 때 그러면 우리는 하루 중 생각을 떨쳐버리고 진정으로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얼마나 지니고 있는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은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그렇게 자주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만큼 살아가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생존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 보니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지니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당장 눈으로 볼 수 없기에 받아들이는 것 또한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의 범람으로 정신이 산만해지거나 욕망에 젖어드는 현상을 마냥 바라만 보거나 방치해 둘 수만은 없는 문제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번뇌를 줄이고 마음에 선명성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이를 해소할 방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성찰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성찰의 일단에서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 ~ 그로 인해 너무 많은 요구와 간섭과 욕망을 부추기는 나를 조율할 방식에 대해 탐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습니다만 만약 쉼 없이 떠오르는 번뇌를 다스릴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틈틈이 고요를 내면에 정착시켜보는 것은 어떨까요. 누구에게나 내면 깊은 곳에는 잠재된 고요의 씨앗이 있습니다. 특히 이 고요는 마음이 잠잠해졌을 때 우러나오는 실체로 평정과 편안과 겸손을 겸비한 성품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요와 접목할 때 내면의 정서는 더욱 깊고 차분해질 것이며 잠재된 무의식의 발현은 더없이 소중한 창조로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유에서 얼마 전 필자가 경험한 무위(無爲-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짐) 속 고요는 또 다른 차원의 고요로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는 면 소재지가 있는 홍덕정 거리를 지날 때였습니다. 평소에도 그리 많은 사람이 왕래하던 곳이 아닌 데다가 이날은 월요일이어서 그런지 한산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한산한 풍경이 마치 사람이나 자동차나 할 것 없이 일시에 멈추어버린 듯한 고즈넉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전에 볼 수 없었던 고요함을 동반한 정적 기운이 온몸을 휘감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약 10여 분 그 짧은 시간에 차도 사람도 움직이지 않은 그 묘한 분위기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마치 전혀 딴 세상에 온 것처럼 고요 속에 내가 우뚝 서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울 정도였습니다. 이 순간에 느끼는 고요는 여느 때와는 다른 정말 특별한 고요함으로 다가왔기에 동화된 마음을 놓기가 어려웠습니다. 아! 이 고요를 언제 맛보았던가? 그야말로 고요가 절정에 이르러 나타난 또 한 고요의 경이로움에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간 명상을 하면서 자의적으로 고요를 담아왔지만, 밖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러한 고요는 전혀 새로운 기운과 맛을 담고 있었습니다. 무위(無爲) 속 고요, 그 어떤 인위적 요건 없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이러한 고요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며 염원하던 고요인 것은 아니었던가를 생각하니 그 감회가 더욱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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