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임 종 욱
작가 임 종 욱

내가 남해를 처음 본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여름방학이었는데, 친구들과 함께 남해안을 둘러본 뒤 부산까지 이르는 일정이었다. 그때 남해로 들어올 수 있는 창구는 남해대교가 유일했다.

우리들은 상주 해수욕장과 금산의 바위길, 그리고 보리암을 살펴보고 남해를 떠났다.

그 무렵 남해대교는 지금 내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버스로 여행했으니 들고나면서 지나왔을 텐데, 이상할 정도로 떠오르지 않는다. 여정에 충렬사나 노량 횟집촌이 없었나 보다. 기억의 편의적 선택이 놀랍다.

내가 다시 남해를 찾은 것은 30년이 지나서였다. 남해군으로부터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의 <촌은집> 번역 의뢰를 받고 현장 답사 겸 찾았다. 유희경은 남해와 연고가 없지만, 문집 <촌은집>의 목판이 용문사에 남아 있다. 증손자 유태웅이 이곳에서 문집을 다시 간행했다고 한다.

그때 본 남해대교는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짙은 주홍색의 두 교각이 떠받들고 있는 교량을 건널 때 버스는 노량의 푸른 해협 위로 하늘을 가로지를 듯 달렸다. 현수교가 가진, 마치 출렁다리 위로 버스가 달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아찔했다. 첫 만남의 울렁거림. 그때는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이 다리를 건너게 될 줄은 몰랐다.

횟집들이 몰린 바닷가에 서면 노량대교는 울연 웅장해진다. 해협을 가로지르는 가는 횃대가 위태로우면서도 경이감을 던진다. 그 자리에 설 때면 남해를 들어오면서 처음 느꼈던 울렁거림이 다시 인다.

역사적으로 노량은 여러 의미가 있다. 임진왜란의 마지막을 장식한 ‘노량해전’과 이순신 장군의 최후가 겹쳐지는 ‘충렬사’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때의 역사를 다룬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가 촬영이 끝나 개봉될 예정이라니, 기대가 크다.

그러나 노량해전보다 훨씬 앞서 노량은 역사에 등장했다. 고려 중기 몽골의 침입 때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이겨내길 염원하며 재조대장경(지금 합천 해인사에 있는 그 대장경이다)을 판각했다. 당시 남해는 판각의 중심지였고, 판각에 필요한 판목들이 지리산에서 채벌되어 섬진강을 지나 이곳 노량으로 들어왔다.

노량바닷가 / 유화 / 72X50cm
노량바닷가 / 유화 / 72X50cm

그보다 조금 뒤에는 정지(鄭地)장군과 관음포 대첩이 있었다.

이따금 노량에 가 충렬사를 참배하고 바닷가 횟집에서 싱싱한 회와 함께 소주를 걸칠 때 저녁노을에 물들고 남해대교의 불빛이 바다에 드리운 모습을 보면 고흐의 ‘르오노강의 별이 빛나는 밤’이 연상된다.

노량에는 2018년부터 또 하나의 다리 노량대교가 들어섰다. 하얀 교각이 가느다란 교량을 얹은 광경은 곤돌라 한 척이 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투박한 남해대교가 남성적 느낌의 다리라면, 희고 날씬한 교각의 각선미를 자랑하는 노량대교는 여성미가 물씬 풍긴다.

음(陰)과 양(陽). 고전미와 현대미가 대조와 조화를 이룬 두 다리를 지켜보는 풍미는 남다르다. 설렘을 안고 남해를 찾는 사람들에게, 남해의 진미를 맛보고 떠나는 사람들에게 두 다리는 ‘신선의 고장’을 찾았다 잠시 이별하는 지점에 선 우화등선의 공간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유희경과 비운의 사랑을 나눴던 기생 매창(梅窓)이, 헤어진 연인에게 보낸 시조는 남해대교를 통해 남해에 왔다가 떠나는 길손에게 남해가 보내는 연가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할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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