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월 영전 난곡사보존회 회장
송 월 영
전 난곡사보존회 회장

남해신문 1535호 2021년 6월 4일자 6면에 난곡사에 대한 전면기사가 보도됐다. 

이 기사에서 제시한 난곡사 관련 정보 중 오해의 소지가 있는 자료가 있어 이 글을 쓰게 됐다. 

남해신문의 ‘난곡사’ 기사에서는 1601년(선조 34년)에 난곡사가 처음 건립되었고 난계서원이라고 불렸으며, 이곳에 이희급과 이희계 두 분을 배향하다가 1783년 난계사로 이름이 바뀐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방치되었던 것을 1925년 4월 20일 백이정, 이제현, 박충좌, 이희급 네 분을 모신 사우로 다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이 내용과 연결해서 이 기사 맨 처음에 현재의 난곡사 위치인 ‘이동면 난음로 219번길 7-14’ 주소가 소개되어 있어서, 마치 난계서원과 난계사도 지금의 난곡사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하지만 ‘난곡사’와 ‘난계사(난계서원의 명칭을 받았던 곳)’는 엄연히 다르다. 처음의 난계서원(이후 난계사)은 난양리 453-1번지에 있었고, 난곡사(현재 위치의 난곡사)는 난음리(난음로 219번길 7-14)에 있으니 그 위치는 확연히 다른 곳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정리하면 처음에는 남해 출신이 분명한 이희급과 이희계 선생을 난양리(난계선원 또는 난계사)에 모시다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백이정 선생이 심었다는 고목과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현재의 난곡사 위치에 이제현, 박충좌, 이희급 선생을 함께 모시게 된 것이다. 

또한 기사에서 이제현과 박충좌 선생이 우리 남해와 특별한 인연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지만 구전되고 있는 이야기들을 귀담아 들어보면 반대로 남해와의 특별한 인연을 찾을 수 있다. 
삼동면 시문마을에서 태어났다는 백이정 선생의 탄생설화라든지, 박충좌가 백이정 선생의 늘그막에 남해에서 어버이 모시듯 수발하였다는 설화, 이제현 선생의 묘가 난화방에 있었다는 이야기 등은, 비록 설화이지만, 무시하지 못할 신빙성이 있다. 

고려시대 때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 선생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체계를 파악하여 크게 일가를 이룬 이는 백이정 선생이다. 익재 이재현 선생과 치암 박충좌 선생은 백이정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배우고 돌아왔을 때 이제현과 함께 제일 먼저 가르침을 받았다. 백이정 선생은 남해군의 난곡사를 비롯해 남포의 신안원, 충주의 도통사, 진주의 도통사에서 향사하고 있으며 묘소는 남해군 남면 오리정(五里亭) 우지막골에 있다. 

남해 출신이면서 대과에 급제하고 임진난 때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명실상부하고 위대한 향현인 난계 이희급 선생은 임진난 후 1601년 난계서원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된, 난양리 453-1번지 위치의 사당에 모셔졌다. 이후 지방의 뜻있는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일제 강점기임에도 향사의 깊은 학문과 높은 우국충정, 뛰어난 공훈을 기리기 위해 기존 난계사의 이희급 선생을 모셔와 백이정, 이제현, 박충좌 선생과 함께 현재의 난곡사에서 향배하게 된 것이다. 

유교 성현의 뛰어난 학문과 유맥(濡脈)을 잇고 선조의 공훈을 기리며 흠모하는 것은 후손의 당연한 도리요, 이를 널리 확충하고 발양함은 만세에 널리 유익함을 전하고자 함이니 어찌 부지런히 정진하고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직 정성과 공경으로 받들고 널리 실행함에 혹시나 부족함이 있지나 않은지 다만 삼가고 또 삼갈 뿐이다. 우리들이 유도의 길을 이어 후손들에 이어주고 세세생생 사람의 올바른 길을 밝히고 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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