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이봉조
작곡가 이봉조

남해에서 벌어지는 축제 현장을 찾다 보면 약방의 감초처럼 색소폰 밴드를 만나곤 한다. 외부에서 초청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대개 남해에서 자생해 공부하고 나름대로 일가를 이룬 뮤지션이다. 독주부터 합주까지 인원도 다양하고, 노래의 반주부터 악단의 일원까지 역할도 다채롭다.

색소폰 연주는 축제 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남해문화원 문화강좌부터 읍면별 지역 교육에서도 심심찮게 색소폰을 가르치고 배우는 풍경이 목격된다. 색소폰이 배우기에 비교적 쉬운 악기라지만 너나없이 색소폰 익히기에 열중하는 것을 보면 괜히 ‘나도 한 번 배워볼까?’ 하는 충동을 느낀다.

이렇게 남해 곳곳에서 색소폰 열기가 뜨거운 것은 왜일까? 군민들의 예혼(藝魂)이 남다른 데서 나온 결과겠지만, 모든 열매는 거슬러 오르면 다 뿌리가 있기 마련이다. 자 그 뿌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여기 그 뿌리가 ‘작곡가 이봉조’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은 작곡가 이봉조(李鳳祚, 1932-1987)가 자신의 고향 남해에서도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고 이들은 말한다. 기자가 다른 일로 만났다가 이봉조 ‘광팬’임을 알게 된 이영태 선생도 그들 중 한 분이다.

대한민국 중장년들의 아이돌 작곡가 이봉조
기자에게도 이봉조는 낯설지 않은 작곡가다. 아니 색소폰 연주자이자 가수(?)다. 꽤 오래 전 텔레비전이 흑백이었을 때, 어느 겨울 ‘이봉조 씨’가 색소폰을 부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는 색소폰을 신나게 불어대더니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아아∼ 올해도 떡국 한 그릇 더 먹어야지∼” 하는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닌가. 가사는 분명하지 않아도 설날 특집 방송에 나왔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기자의 뇌리에는 이봉조라는 이름이 깊이 새겨졌다.

이런 기억이 비단 기자만의 추억일까? 이봉조를 몰라도 그가 작곡한 주옥같은 불멸의 노래들을 들으면 ‘아! 이 사람이…’ 하며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가 만든 곡은 열거하기에도 숨이 차다. 전부 3백여 곡 된다고 하는데, 대표곡만 해도 <떠날 때는 말없이>를 필두로 <밤안개>, <보고 싶은 얼굴>, <철없는 아내>, <사랑의 종말(번안곡)>, <맨발의 청춘>, <종점>, <웃는 얼굴 다정해도>,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바로 그 이주일 씨가 부른 노래다)>, <무인도>, <꽃밭에서>, <좋아서 만났지요>, <나의 별> 등 헤아리다 보면 날이 저문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겠는가?

작곡가 이봉조는 남해군 창선면 수산리 178-1번지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부농이어서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치면서 음악적 소양을 키웠다.

중고등학교는 진주에서 다녔는데, 진주중학교 때 음악교사인 작곡가 이재호를 만나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시절 미군부대에서 존 콜트레인(1926-1967)과 소니 롤린스(1930-) 등의 테너 색소폰 연주를 듣고(레코드였을 것이다) 감동해 학교 밴드부에서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들어갔지만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던 그는 악단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연주자로서의 기량을 쌓아갔다. 졸업 후 잠시 서울시청 토목과에 근무하면서도 미8군 악단에 들어가 연주했다. 1961년 퇴직한 뒤부터 그는 본격적인 연주자 생활로 접어들었다. 이때 평생의 반려가 되는 가수 현미를 만나 수많은 히트곡을 뽑아냈다.

가수 정훈희와의 만남도 각별하다. 둘은 함께 국내 최초로 일본 동경 국제가요제와 그리스 가요제 등에 참여해 입상했다. 또 1974년에는 칠레가요제에 <좋아서 만났지요>를 들고 가 입상하기도 했다. 그에게서 곡을 받은 가수로는 최희준, 차중락, 윤복희, 김추자, 최백호, 김세환(리바이벌), 박경애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줄을 잇는다.

평소 협심증과 당뇨 등 지병이 많았던 그는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서울올림픽 공연분야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결국 1987년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이봉조의 묘소는 남해에 없다. 충남 천안시 광덕면 신덕리 산22번지 공동묘지에서 영면하고 있다. 연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고향의 품에서 쉬기를 바란다.

이봉조음악관 건립을 위해 가수 현미의 집에 모인 사람들. 왼쪽부터 현미 씨, 이영태 난곡사보존회장, 이성지 전 혜성교 교장, 박성석 경상대 명예교수, 사촌동생 이봉안 씨
이봉조음악관 건립을 위해 가수 현미의 집에 모인 사람들. 왼쪽부터 현미 씨, 이영태 난곡사보존회장, 이성지 전 해성고 교장, 박성석 경상대 명예교수, 사촌동생 이봉안 씨

남해에 이봉조 음악관을 세우고 싶은 사람들
이영태 선생이 들려주는, 이봉조 음악관 건립에 따른 사연은 감탄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남해의 여러 뜻있는 사람들이 이봉조를 남해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자리매김하고자 모였다. 이영태 선생을 비롯한 하미자 문화원장, 해성고 교장을 지낸 이성지 선생, 경상대 명예교수 박성석 교수, 이봉조의 사촌동생인 이봉안 씨 등이 그들이다.

이 분들은 먼저 미망인 현미 씨를 찾았다고 한다. 음악관을 세우려면 음악 외에도 평소 손때가 묻은 자료들은 필수적이다. 2019년 1월 현미 씨를 만나 의향을 타진했더니, 아주 흔쾌하게 기증을 약속했단다.

그 목록을 보면 애용했던 색소폰 3점과 자필악보 전체, 생활용품 들과 수여받은 상장과 상패 등이다. 또 유족 외 사람이 소장한 유품들은 복사하거나 이미테이션으로라도 만들어 전시할 수 있게 협조하겠다는 다짐도 받았다. 그러면서 음악당 건립이 성사된다면 이봉조의 곡을 받은 가수들을 모두 섭외해 성대한 기념음악회를 여는 일도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출발은 참으로 찬란했다.

기대에 부풀었던 이들의 희망은 아쉽게도 아직까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여러 방면으로 기획서를 올리고 건의도 했지만,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방치하지 말고 작곡가 이봉조가 남해사람들의 자랑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영태 선생은 말했다.

여러 예술 분야 가운데서도 음악은 흡입력과 생명력이 가장 강고하고 끈질긴 장르다. 사람은 가도 음악은 남는다. 

청각을 통해 안착된 감동은 어떤 세월도 뛰어넘는다. 각종 방송에서 음악 관련 프로가 각광을 받는 데도 다 까닭이 있다.

기념음악관은 규모가 클 필요도 없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건물을 보러 오지 않는다. 자신들의 영원한 아이돌, 롤모델, 그 사람의 자취와 체취가 그리워 온다. 세대와 성별을 뛰어넘어 팬덤을 형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음악관을 염원하는 이분들의 꿈이 하루 빨리 성사되기를 기자도 성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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