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야의 초목이 푸르고 신록이 우거지는 계절, 일 년 중 푸르름이 가장 짙게 물들 시기입니다. 보통 이때쯤이면 들판이나 농로에 자라나는 풀과 잡초 때문에 고심합니다. 한층 진화된 예초기의 칼날마저 무디게 할 정도로 억센 풀과 잡초의 생명력이 농심(農心)을 힘들게 하지만 그래도 이 계절에 우리가 담아내야 할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살펴본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달이기도 합니다. 각각의 생명은 봄에 씨앗을 뿌려 생명을 소생하게 하고 여름에 성장을 도모하며 가을에 결실을 보아 겨울에 양분을 저장하는 순연한 질서를 통하여 성장을 이룹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그 무엇이 있길래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사계절이 바뀌어도 명확하게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물론 지구의 공전과 자전이나 음양의 질서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러한 질서가 순리대로 운행하는 데에는 그들만의 약속된 어떤 질서가 있기에 가능하지 않을까요. 다소 공상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그들 특유의 믿음과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믿음과 신뢰, 이 기막힌 의지가 상생과 공존을 이끌 핵심 요소라면 인간사 의식을 고양할 절대 믿음, 절대 신뢰와 같은 교훈을 신록의 달 6월에 적용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과 신뢰가 주는 예를 자연의 현상 속에서 살펴보아도 햇빛이 전체 생명에게 실어주는 믿음은 일 년 365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됨은 물론, 달과 별 등의 우주 작용 역시 믿음이 있기에 순환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 생명이 이러한 믿음 속에서 성장하고 믿음의 원리를 성장의 거울로 삼아 살아간다고 정의할 때 그러면 우리 사람의 믿음은 어느 정도일까요.

만약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와중에 나와 상대의 관계가 불편, 불일치, 불민하다면 이를 즉시 해소하여 일심(一心)이 되도록 상호 노력하는 것도 믿음을 가시화하는 요건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우리 모두의 생명을 성장시키기 위한 동력이 될 수 있다면 이러한 질서가 절정에 이를 신록의 계절 6월을 예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잎이 무성해야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지듯이 일심 역시 무성한 잎처럼 믿음이 충만해져야 성장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신록의 계절을 장식할 숲은 각자 생명 혼자만으로 살아갈 수 없지만 믿음을 근거로 한 공존의 질서가 내재하고 있기에 가능할 것입니다. 숲 자체의 역량으로 양산하는 공기와 산소를 보더라도 믿음이 절정에 이르러야 생산될 수 있는 최고의 자연 에너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신선한 자원을 그리워하며 밝고 쾌적한 공기와 산소를 마시길 원하면서도 공기를 부패하게 하고 산소를 더럽히는 일을 자행한다면 사람과 자연 사이의 믿음은 절대 형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를 오늘의 현실에 빗대어 코로나가 범람한 것도 사람의 무지와 물질의 복잡한 것과 공기의 부패한 것이 극도에 이르러 나타난 현상이라면 이 신록의 계절에 우리는 무엇을 취해야 하겠습니까? 

상생과 공존의 질서, 그 내밀한 정서를 이룰 믿음에 대하여 좀 더 관심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과 신뢰가 근간이 된 동반 성장 이것이 신록의 계절에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요, 과제라면 이 믿음을 현실화하도록 노력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으면 비록 태산을 옮길 무리수 일지라도 그를 인정할 것이요, 만약 믿음과 신뢰가 없으면 아무리 미사여구를 늘여 놓아도 그의 존재는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다짐이라면 믿음은 나와 상대를 잇는 연결고리로써 최고로 신뢰할 수 있는 내면의 다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의 삶은 모든 것이 남의 도움이 없이는 한시라도 살아갈 수가 없는 만큼 전체가 상보 협동하는 질서 속에서 공존하는 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요 또한 이것이 나의 믿음을 굳건히 하는 길에서 시작되기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 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 꽃은 자신을 위해 향기를 퍼트리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 참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고루한 이익을 얻기 위해 생사에 집착하는 것과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전체 인간사를 유익하게 해줄 공덕이라는 전제하에 믿음을 내면화하는 이 양자 중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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