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어촌 남해에 둥지를 틀자 좋은 점도 많았지만, 불편한 점도 있었다. 차를 두고 왔으니 다니기 불편한 거야 감수할 일이긴 했는데, 책이 없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대학 때부터 박사학위를 받고 강의를 하고 논문과 소설을 쓰면서 내 생각의 원천은 책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많은 책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가지고 있던 책의 대부분은 아는 출판사 창고에 맡겼고, 몇 백 권 정도만 이삿짐에 넣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남해에서도 글을 쓰자니 책이 필요했다.
있는 책도 다시 사야 했는데, 아깝기도 했지만 주머니 사정이 녹록치 않았다. 그때는 읍에 해양당서점이 있었는데, (한 도시를 대표하는 서점이 사라지는 일은 옛 사랑의 기억을 지워야 하는 일만큼 비극이다) 전문서적이나 필요한 책이 마침맞게 있지 않았다. 온라인 서점에 주문을 넣어도 며칠간의 공백이 생겼다. 성질도 급한 데다 당장 필요하니 답답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별별 지식이 “나 여깃소!” 얼굴을 내밀지만 넙죽 받기에는 변심할 애인처럼 미덥지 않다.
그때 구세주처럼 내 앞에 나타난 책의 보고가 남해의 도서관이었다.
남해에는 읍에 ‘화전도서관’과 ‘남해도서관’이 있다. 이 두 곳을 나는 “쥐가 풀방구리 드나들 듯” 찾았다.
두 도서관은 보완재 구실을 한다. 남해도서관에는 장서량이 많고, 화전도서관에서는 신간서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두 도서관은 지식에 대한 갈증을 씻어주는 오아시스다.
독서의 좋은 점을 여기서 열거하는 것은 지면 낭비다. 세상의 지성인들이 온갖 비유로 독서의 소중함에 대해 말했다.
서가에 병사처럼 줄지어 선 책을 보면 읽지 않아도 기분이 좋아진다. 맛좋은 음식인 양 입맛을 다시게 하는 향기를 피우면서 나를 유혹한다. 묵은 책이 주는 고색창연함과 새 책이 주는 우후청아(雨後淸雅)함은 ‘샤넬 넘버5’도 담아내지 못한다.
이 향수에는 재스민을 비롯해 장미, 바이올렛 등 약 83가지의 재료가 들어간다고 한다. 25그램을 만들려면 장미 꽃잎이 45킬로그램이 필요하단다.(인간의 욕망 때문에 희생당하는 장미는 무슨 죄냐!) 그러나 한 권의 책에 쓰인 재료는 무한대다. 그래서 향기의 다양함도 무한이다.
나는 책을 읽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웬만큼 몰입하지 않고서는 하루에 한 권도 읽지 못한다. 한 권을 놓고 한 달 넘게 끼고 사는 일도 잦다.
어디를 가든(심지어 목욕탕일지라도) 한두 권의 책이 동행한다.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는 게 다반사지만, 손이 허전하면 영혼을 어디 두고 온 것 같다.
책을 빌리거나 반납하려고 도서관으로 갈 때 나는 가장 행복하다. 베버란 작곡가는 ‘무도회의 권유’란 아름다운 곡을 썼는데, 이 곡도 도서관이 들려주는 ‘독서에의 권유’ 만큼 매혹적이지는 않다.
남해에 더 많은 도서관이 생겨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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