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5월이 다 가기 전 우리 한국의 아버지와 중국의 아버지의 감동적인 얘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진아 기념 도서관’
5월초 서울에 갈 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지인과 함께 경복궁과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3·1절 기념행사를 하는 서대문 독립공원이 어떻게 공원으로 조성이 되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독립공원을 찾아갔다. 그곳 서대문 형무소 있는 독립공원보다 어쩌면 더 감동적인 한 아버지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그 감동적인 사연을 전하고자 한다. 서대문독립공원 내에 위치한 ‘이진아 기념도서관’. 사람 이름이 들어간 것이 우선 특별했고 더욱이 여자 이름으로 된 도서관의 얘기가 더 궁금했다.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2758㎡(836평) 규모의 현대식 건물에 다양한 열람실과 문화활동 공간, 어린이 놀이방 등 각종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독립공원내에 도서관이 있다”며 놀라워 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맞은 편 벽면에 붙은 동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 아버지의 간절한 사랑으로 서대문구립 이진아 기념 도서관이 건립되었습니다” 동판엔 이 도서관이 만들어지기까지 사연이 한편의 시처럼 기록돼 있었다. 
아버지와 사랑하는 딸의 얘기가 궁금했다. 아버지는 국내 중소 의류수출업체인 현진어패럴의 이상철 대표였다. 딸 이진아 씨가 2003년 미국 어학연수 중 23세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뜨자, 유독 책을 좋아했던 딸을 기리기 위해 2005년 50억원을 도서관 건립비로 지원했다고 한다. 거액을 기증하면서 이 대표는 “도서관에 딸의 이름을 붙여달라”는 딱 한 가지만을 요청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지어진 이 도서관은 서대문 구민들의 사랑 속에 수많은 아이들의 배움터로 자리잡았다. 서대문구에서는 모범적인 도서관 운영으로 상도 여러 차례 받았고 현재도 매년 약 60만 명 이상이 이곳을 이용한다고 한다. 

중국 피아니스트 푸충의 아버지 푸레이(1906∼1966)
적국으로 망명한 피아니스트 아들에게 보낸 감동적인 편지

‘아버지 술잔에는 눈물이 반’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는데 중국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푸충의 아버지 얘기다. 푸충의 아버지 푸레이는 중국의 유명한 번역가이자 음악평론가였다. 푸레이는 음악에 일찌감치 재능을 보인 아들 푸충을 폴란드 바르샤바 음악원으로 유학 보낸 1954년부터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편지는 푸레이가 문화혁명이라는 광기에 내몰려 자살을 선택하는 1966년까지 계속된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힘을 다해 우리의 경험과 냉철한 이성을 너희들에게 바쳐 너의 충실한 지팡이가 되고 싶다. 어느 날, 네가 이 지팡이가 귀찮다고 생각할 때 나는 소리 없이 종적을 감추어 절대 너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들 푸충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정은 이리도 깊다. 지팡이 노릇을 하다가 아들이 지팡이를 귀찮아하는 순간 종적도 없이 사라지겠다는 결기. 이것이 푸레이의 부정이다.
푸레이와 푸충의 편지는 중간에 중단될 뻔한 위기에 처한다. 1958년 푸충이 당시 적성국가로 분류되던 영국으로 망명하자 중국 공산당은 푸레이 부자의 서신 왕래를 금지시킨다. 그러자 푸레이는 당시 권력 실세였던 저우언라이에게 “부자 관계는 그 어떤 것도 막아설 수 없는 천륜”이라는 내용의 탄원을 보내 예외적인 허가를 얻어낸다. 이념도 부정(父情)을 인정한 것이다. 푸충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집단최면이 사라진 1978년 중국으로 귀국해 베이징음악대학 교수를 하다가 2020년 사망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주고받은 편지 110통은 ‘부뢰가서(傅雷家書)’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돼 대륙을 울렸다. 
한국에서도 ‘상하이에서 부치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인생철학, 식탁에서 지켜야 할 기본 매너까지 아들의 올바른 삶을 위해 고뇌했던 아버지의 속 깊은 눈물이 배어 있다.
푸충의 편지내용 중 꼭 기억에 남아 있으면 하는 감동적인 내용은 이런 귀절이다.

“아들아, 행동은 깊은 물을 만난 듯이, 얇은 얼음을 밟듯이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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