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극산성에 선 탐방객들. 더 오를 곳이 없어 아쉬웠다
대국산성에 선 탐방객들. 더 오를 곳이 없어 아쉬웠다

소풍 날 비가 온다더니, 오늘이 그날이다. 수필 강좌 글감 찾기 답사를 하는 토요일 아침. 전날부터 날씨가 꾸물꾸물해 걱정이더니 가랑비와 굵은 비가 오락가락한다. 취소되나 싶었는데, 예정대로 걷는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나섰다.
답사객 12명이 설천면 면사무소 앞으로 모였다.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배낭을 어깨에 메고 슬금슬금 내리는 비를 향도 삼아 산행에 올랐다.

수필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자신만의 경험과 감성이 없다면 쓰기 어렵다. 누에고치가 있어야 비단이 나오듯 내면에서 울어낸 실로 자아내야 따뜻한 옷이 만들어진다.

또 수필 쓰기는 등산과도 닮았다. 건강에 좋으니 산을 타자며 대뜸 에베레스트 산부터 올랐다가는 사고를 당해 냉동인간(?) 되기 십상이다. 야트막하지만 묘미가 있는 뒷산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는 게 좋다.

그래서 오늘 비에 젖은 대국산을 오르는 여정은 맛깔 나는 수필이 나오는 첫걸음일 수밖에 없다.

대국산 어름에서 시상에 잠기다

수필은 시와 가장 가까운 장르기도 하다. 꾸미기에만 급급하다가는 본색은 잃고 화장발에 현혹될 우려가 있다. 시가 이미지를 길어내듯 수필은 절제된 마음의 고갱이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설천면에 둥지를 튼 문성욱 시인의 보금자리를 찾는 일은 그래서 새로웠다. 집은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와 시상을 톺아내기에 알맞았다. 집 앞 시인의 시비와 시판들에는 설천을 굽어보며 걸러낸 관조의 사상을 잘 담아냈다. 그런 시에 조금 살을 붙이면 좋은 수필이 되지 않을까.

대국산을 두르며 난 산간 도로가 칡덩굴을 부여잡고 오르는 수고를 덜어줬다. 비도 적당히 내리다 그쳐 이마의 땀을 씻어냈다.

대국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원뿔을 타고 오르듯 완만하지만 숲과 새가 주는 정취를 느끼기에 그만이었다. 또 짙푸른 녹음 사이로 하얗게 번져나가는 비안개의 휘장은 선경(仙境)에 빠져든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오늘의 바래길 길잡이 남해관광문화재단 바래길팀장 윤문기 님이 들려주는 길과 몸의 미학도 구수했다.
길가에 다소곳이 핀 꽃들은 이름을 몰라도 울긋불긋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면서 꽃과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제법 가파른 가풀막을 허위허위 오르니 대국산성이 우리를 맞았다.

형제의 우애처럼 늘 우리 곁에 있는 대국산성

대국산성은 구름바다 위에 떠 있었다. 하얀 솜사탕 위로 푸른 고명 같은 산봉우리가 얹어졌달까. 비에 젖은, 비안개에 묻힌 대국산성은 낯설기보다는 반가울 게 분명했다.

짱짱한 햇살을 받은 산성이 총천연색 영화라면 오늘 이 백색과 녹색의 파노라마는 오래된 찰리 채플린의 흑백 영화를 마주한 듯했다. 거기에 저마다 쓴 파랗고 노랗고 빨간 우산들이 광활한 우주에 점을 찍은 것처럼 분위기를 돋우었다.

안내판에 적혀 있는, 산성을 축성하게 된 전설이 풋풋한 형제애와 사랑의 비정함을 함께 들려주었다. 내기에 진 형이 미련없이(?) 동생에게 사랑을 양보했듯 우리네들도 천 년 변함없는 겸양과 겸손의 미덕을 배우라고 산성은 일깨우고 있었다.

탐방객은 짝을 지어 도시락 김밥을 나눠 먹었다. 신선주(神仙酒) 한 잔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하산해 속세에 이르면 걸걸한 막걸리 한 사발로 갈증을 씻기로 하고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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