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친구와 뛰놀다 어른 앞을 지날 때면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얘야! 뭔 바쁜 일이 있냐, 왜 그리 뛰어가니, 넘어져 다치면 어쩌려고” 대개 아이들은 뛰어가더라도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른의 입장에서는 뛰어갈 정도라면 반드시 바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단합니다, 아이는 놀이로, 어른은 아주 바쁜 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동네에서 놀이에 심취하던 그 당시의 추억을 상기할 즈음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음을 발견합니다. 그 긴 시간을 거치는 동안 사라지지 않은 동심(童心)과 천심(天心)은 여전히 가슴 한 켠에 맴돌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어른으로 자리매김할 동기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현자(賢者)들은 이구동성으로 사람의 품성에서 어린이의 마음이 신성(神性)에 가장 가깝다고 하였고, 또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일갈하였나 봅니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에 보물처럼 남겨진 동심과 천심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면 그 연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어른다움의 품성, 어른다움의 넉넉함, 어른다움의 품격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욕망 때문인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이는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서 느낄 공허함이란 어린 시절에 접했던 동심과 천심의 기억을 재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아쉬움이 아닐까요. 

이러한 기억들이 천심으로부터 발화되어 어린이의 해맑은 심성처럼 마음을 달굴 수 있다면 그 어떤 감정의 기세라도 금방 풀어지고 심안이 열리는 경지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5월은 가정의 달이자 동심과 천심을 아로새길 달이기에 더욱더 그러합니다. 그리하여 동심과 천심에 이르러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융화 소통하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를 건전하게 이끌 역량을 갖춘다면 가정의 달 의미가 더욱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내밀한 정서가 어린이의 마음이요 이로부터 어버이를 모시는 정성도,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불화불순도, 스승과 제자의 사랑과 존경도 천심으로 모시고 행함으로써 그 의미를 살릴 수 있다면 우리의 정신 사조는 일대 혁신의 대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진화하는 문명 사조에 맞추어 사람의 의식도 이에 합당한 정신 사조로 함께 진화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개벽’사를 이끈 소춘 김기전 선생(소파 방정환 선생과 함께 어린이 운동을 전개하신 어른)의 어록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효도라는 관점에서 어른은 아이에게 효도와 예절을 이야기하면서 그 어른은 아이에게 어떤 예절을 행하고 있는가? 아이는 무조건 어른의 생각과 감정에 따라야 하고 어른의 지시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예절인가? 아이의 자발적 생각은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어른은 어른으로서의 예절만 있을 뿐이요, 아이에게로 향한 예절이 없다면 그러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예절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말 속에는 순수와 순리의 이치를 하늘에 두어 조금도 어김이 없는 어린이의 마음을 더욱 숭상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서울 종로구 경운동 88번지 수운회관 앞에 있는 세계 어린이 운동 발상지 표석에는 어린이 인권 운동가 방정환 선생의 유시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누르지 말자. 삼십 년 사십 년 뒤진 옛 사람이 삼십 사십 년 앞 사람을 잡아끌지 말자. 

낡은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선 사람과 뒤진 사람, 낡은 사람과 새 사람의 비유는 동심과 천심이 마음의 바탕이 되어야지 습관된 마음이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동심을 열어라, 천심으로 행하라”라는 이 말이 5월의 표어로 정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지니게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어린이와 같은 동심이나 천심이 내재되어 있음으로 누구나 이 마음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나 할까요. 

이러한 혜안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어른이 될 준비를 미쳐 갖추기 전이라도 아니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상태라도 여전히 남아도는 동심과 천심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적셔줄 희망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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