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동 길숭실대 명예교수·경제학
류 동 길
숭실대 명예교수·경제학

한국의 대학이 위기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정원을 채우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대학이 수두룩하다. 오래전부터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들이 문을 닫을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았다. 남쪽의 지방 대학부터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벚꽃이 늦게 피는 수도권이라고 안심할 건 아니다. 요즘엔 벚꽃이 거의 동시에 핀다.

올해 대학입학 정원은 55만여 명이지만 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자는 42만6344명이었다. 지방대를 중심으로 빚어진 대규모 정원 미달 사태는 당연한 결과다. 올해 대학 입학생의 거의 대부분은 2002년 출생자다. 2002년 출생자는 49만2111명으로 처음으로 50만 명 선을 밑돌았다. 이미 19년 전에 오늘의 상황이 예견됐지만, 그동안 아무런 대책도 없이 대학을 양적으로만 키웠다. 연간 출생자는 1970년 100만여 명에서 1980년 86만여 명, 1990년 65만여 명, 2000년 63만 여명으로 계속 감소하다 지난해에는 27만5815명까지 쪼그라들었다. 외국인 유학생을 왕창 유치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20년쯤 뒤에는 대학입학 정원을 현재의 절반 이하로 줄여야 한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런데도 전남 나주에 에너지 특화 대학으로 한전공대를 설립한다고 한다. 이를 위한 특별법이 이미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에 따르면 2025년까지 학생을 1000명 규모로 늘리고, 설립·운용비용은 한국전력과 정부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서 조달한다. 학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주고 기숙사에 수용하며, 최고 수준의 총장과 교수진을 구성해 2050년까지 세계 10위권 대학으로 도약한다는 목표다.

좋은 대학, 세계 일류 대학을 만들겠다는 걸 누가 반대하랴. 그런데 한전공대 아니면 일류 대학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라는 것 이외에 설립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에너지 특화 대학이 필요하다면 기존의 대학을 지원하면 될 일이다. 전남 지역이라면 전남대나 조선대 등이 있고, 이미 전국에 이공계 특성화 대학이 5곳(한국과학기술원,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광주과학기술원, 포스텍, 울산과학기술원)이나 있다.

정부·여당은 “기존 대학들은 혁신 모델 창출에 한계가 있다”며 “창의적·혁신적 교육 모델을 제시할 한전공대 설립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건 기존의 대학을 모독하는 것으로, 한전공대 설립을 밀어붙이려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이제 겨우 부지 정지 작업을 하고 있으면서 대선 직전인 내년 3월에 개교하겠다고 서두르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유명 대학이 하루아침에 죽순처럼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공약이란 것도 그렇다.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공약 중에는 엉뚱한 것도 있고 서로 모순되는 것도 있다. 공약 당시와 상황이 달라져 폐기해야 할 것도 있다. 전국 곳곳의 공항 신설, 새만금 개발, 충청권으로의 수도 이전, 동남권 신공항 건설 등등의 공약은 대통령선거전에서 나온 것이다. 그게 국가에 얼마나 큰 부담이 됐는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한전공대 설립 공약도 같은 길을 걸을 게 뻔하다.

한국 대학의 위기는 변화를 이끌어 가기는커녕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서 초래된 것이다. 무엇보다 정원을 채우지 못해 퇴출 위기를 맞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위기다. 게다가 또 다른 도전이 도사리고 있다. 앞으로 원격 교육이 세계적으로 일반화되면 사라지는 대학이 속출하고, 그 빈자리를 정보기술(IT)업체들이 운영하는 ‘기업 학교’가 메울 것이다. 이 예측은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글로벌 인재 포럼 2020’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대학이 맞고 있는 정원 미달 사태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 제기였다.
지금은 선거에서 이길 욕심으로 대학을 신설하는 만용을 부릴 때가 아니라 부실 대학들을 질서 있게 정리할 때다. 폐교 위기에 몰린 국공립대학은 통합하면 그만이지만 사립대학은 스스로 퇴출할 길이 없다. 

폐교하면 학교의 전 재산은 국가에 귀속하게 돼 있다. 그래서 부실 대학이라도 끝까지 유지하려는 것이고, 이는 부실 교육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사립대학이 스스로 퇴장할 수 있는 출구를 열어 주어야 한다. 아울러 모든 대학은 뼈를 깎는 각오로 활로를 찾아야 한다. 대학이 부실하면 ‘인재 양성의 요람’이라는 건 헛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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