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황토빛 바닥과 흰색의 벽면이 아늑한 조화를 자아내는 전시장 내부
짙은 황토빛 바닥과 흰색의 벽면이 아늑한 조화를 자아내는 전시장 내부

뮤지엄남해를 찾았을 때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평일인 탓인지 캠핑장은 한산했지만, 놀이기구를 타고 놀면서 깔깔 웃는 아이들의 표정에는 구김살 한 점 없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고달파도 동심(童心)은 여전히 티끌 먼지 하나 없는 화엄의 세계였다.

이번 달 뮤지엄남해의 전시 작가는 이용은이다. 1일부터 30일까지 전시가 이어진다. 과묵한 코끼리와 하늘하늘 춤을 추는 꽃의 만남. 그래서 전시회 표제도 ‘꽃끼리’라 붙였다. 얼핏 보면 나란하기 어려울 듯한 이 두 오브제를 어떻게 그림으로 승화했을지 무척 궁금했었다.

전시실은 1층 왼편에 자리했다. 뮤지엄 내부는 밝은 톤의 흰색이 주조를 이뤄 밝고 깨끗한 인상을 주었다. 벽면에는 이곳에서 학예사로 있는 김경민 작가의 파스텔 풍 그림들이 걸려 몽환적인

금빛 상아가 당당한 코끼리. 고귀한 품성과 함께 금방이라도 화면을 박차고 나올 듯하다
금빛 상아가 당당한 코끼리. 고귀한 품성과 함께 금방이라도 화면을 박차고 나올 듯하다

분위기를 자아냈다. 광활한 우주에 떠 있는 외로운 별 ‘지구’를 모티프로 한 그의 그림도 뮤지엄을 찾는 즐거움의 하나가 될 듯했다.

전시실에서는 이용은 작가의 10여 점이 조금 넘는 ‘꽃끼리’ 연작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선 다소 외진 곳에 있는 뮤지엄이니 선뜻 찾기 어려운데, 좀 더 많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널찍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용은 작가는 야심만만하고 화혼(畵魂, 쉽게 말하면 ‘끼’)이 넘치는 젊은 화가다.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는데, 공부 욕심도 뒤처지지 않아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도 받았다. 화단의 이력이 짧은데도 여러 차례의 개인전과 다양한 아트페어, 그룹전에 작품을 내놓았다.

기대도 있었지만, 이용은 작가의 작품들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대면하자마자 화폭을 장악해 내는 수완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양화가 가지는 대담한 생략과 절제의 미덕을 지키면서도 선과 면을 치밀하게 조성하는 실험정신이 돋보였다. 육중한 몸피를 지닌 코끼리는 주름 하나하나를 묽은 먹물을 써서 극사실적으로 묘사해 금방으로 화폭을 박차고 세렝게티 평원을 내다를 기세를 보였다. 

그런 욕망을 부추기는 듯 코끼리의 배경은 때로는 하얗게, 때로는 푸른 초원으로, 때로는 화려한 금박을 입힌 가멸찬 공간이 배치되어 우주의 생동감을 구현해 냈다.

코끼리는 범접할 수 없는 숭앙의 대상으로만 다가오지 않았다. 생사만고(生死萬苦)의 번뇌를 육화하면서 초탈한 우람한 코끼리 옆에는 이제 아장아장 첫 걸음을 떼놓은 아기코끼리가 공존하고 있었다. 밖에서 본 놀이하는 아이들이 문득 떠올랐다.

아기코끼리는 몸짓도 귀여웠지만 화사한 꽃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있어 어미코끼리와 동화적인 콘트라스트(contrast, 대비)를 자아냈다.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아가페적인 사랑의 정감이 서로 이마를 부비고 있는 두 모자상(母子象)을 따스하게 감싸고 있었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착상은 수묵의 코끼리임에도 상아는 금빛으로 화려하게 두드러진다는 것이었다. 금은 부귀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구극의 고귀함을 담아내는 빛깔이 아닌가? 세속을 초극하는 가없는 명예와 불멸의 이미지가 잘 수렴되어 있었다.

직접 작가를 만날 수 없는 아쉬움을 남기고 전시장을 나온 뒤 전화통화로 작가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이용은 작가는 ‘꽃끼리’ 연작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전시에 출품한 작품은 수묵과 담채, 금박과 오색 꽃을 버물린 동양화의 전통 스타일에 충실했지만, 이 밖에도 팝적인 요소나 일러스

어미코끼리와 꽃으로 승화된 아기코끼리. 사랑의 온기가 검은색 배경에 담겨 절제미를 보여준다
어미코끼리와 꽃으로 승화된 아기코끼리. 사랑의 온기가 검은색 배경에 담겨 절제미를 보여준다

트적인 기법, 영상을 활용한 역동적인 구성 등 다양한 변주가 녹아 있는 작품도 꾸준히 만들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꽃끼리’ 연작에만 전념할 생각이라는 것이다.

코끼리의 세밀한 주름을 표현하기 쉽지 않았겠다고 물어보았다. 그녀에게서 여러 방법을 시도하다가 화선지를 구겨 붙이고 연하고 진한 먹물로 붓질을 해 입체감을 살리는 기법을 창안해 냈다는 대답을 들었다. 새로운 기법을 찾아가는 고심에서도 젊은 화가의 정진하는 자세가 읽혀졌다.

‘꽃끼리’라는 연작의 표제는 ‘꽃’과 ‘코끼리’를 모은 유포니(euphony, 유쾌하고 듣기 좋은 소리)이기도 하지만, 송이송이 꽃이 모여 다발로 엮이고 넓은 꽃밭을 만들 듯이 자연과 사람이 ‘끼리끼리’ 모여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았으면 하는 염원에서 나왔다고 했다. 시인 김소월이 <산유화(山有花)>에서 상징한, 산[우주]과 꽃[만물]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작가도 꿈꾸고 있었다.

전시 기간 중에 꼭 남해로 내려와 군민들과 자신의 작품에 대해, 예술과 공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서로 공감하는 시간을 가지겠다는 약속을 끝으로 짧은 인터뷰를 마쳤다.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는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라는 시의 첫머리에서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하늘을 본다. 너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에 영원을 담아라”고 노래했다. 마찬가지로 한 폭의 그림을 보고도 우리는 평생의 감동을 길어낼 수 있다.

시간을 내 뮤지엄남해를 찾아 이용은 작가의 코끼리와 꽃에서 삶과 이웃의 소중함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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