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불우 이웃을 돕는다거나 선의의 뜻으로 기부를 할 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더욱 신선한 감동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참 좋은 일입니다. 보통 기부를 하게 되면 이름을 밝히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인데 이분들은 무기명으로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지 않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흔치 않은 일이지만 이러한 선행에 특히 감동을 받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너무 인위적인 행보에 익숙해진 것 때문인 것은 아닐까요. 같은 선행이라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는 분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어느 쪽이든 선행의 기본이라 할 헌신과 자발성이 위축받는 심리하에서 행하여진다면 그 행보 자체가 얼마나 부담스럽고 부자연스럽겠습니까? 알려짐으로써 드러날 차이와 비교에 따른 허무나 반감, 실명이 누락 되었거나 금액의 표기가 잘못되었을 때의 격정 토로 등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행하려거든 아무도 모르게 하고 나타내려거든 아예 하지 말라는 격언처럼 무위(無爲)의 개념을 적용하여 보면 어떨까요. 무위는 어떤 인위적인 요소를 가미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행보 그 자체입니다. 이로써 느껴질 보람은 안으로는 무한한 기쁨으로 내면은 더욱 충만해질 것이며, 밖으로는 우주 전체와 하나요 둘이 아닌 기운을 섭렵하게 될 것입니다. 

우주에 편만한 기운은 밖으로 드러남으로써 풍만해지기도 하지만 드러나지 않아도 그의 신심이 자연스럽게 전체와 공유할 때 느껴지는 기쁨은 상상외로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얻게 될 기쁨은 각각의 성정을 건전하게 이끄는 촉매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연한 이치와 질서를 거역하지 않는 삶을 비유하여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선행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위대하지만 이러한 선행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생명에게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를 통하여 우리가 얻게 될 교훈은 세상을 이끄는 중심은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행보가 바탕이 되어야 실체가 살아날 수 있다는 이치를 터득하게 해줍니다.   

이 순연한 이치를 거울삼아 또 하나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것은 불연(不然)으로 우리의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는 또 한 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러면서도 (긍정) 그 이면에 드리워진 질서는 그렇지 않은 (긍정 속 의문) 경이로운 입자의 흐름이 내재한 곳입니다. 그런 것 같지만 보이지 않으니 그런 것 같지 않은. 마치 없는 듯하면서도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현상도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드러나지 않는 오묘한 불연의 질서가 형성되어 있기에 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세계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탐구해야 할 영역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차원 변화의 기류 속에 담겨있는 불연의 향상성입니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같이 하늘을 나는 지혜를 품부하기까지 수많은 변화 속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입니다. 그 가능성의 일단에서 가축이 어떻게 사람의 말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농작물이 어떻게 주인의 숨소리, 발걸음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전혀 인위적이지 않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성찰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어떤 감정 상태에 따라 심기가 불편하거나 편안치 못하여 주변 생명이 모두 그러한 기운에 영향을 받는다면 이 심기를 진정시킬 방안은 인위가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로를 통하여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생명에 흐르는 입자의 기본질서는 자연스러운 순환 그 자체이며 그것을 인위적으로 해석하고 논단하면 할수록 부작용은 심화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언일행의 시작과 끝, 일체 생명의 화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인간의 내면을 평정할 무위와 불연의 질서가 마음을 평온하게 할 새로운 대안으로 떠 오른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의식에도 엄청난 변화가 도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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