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임 종 욱
작가 임 종 욱

2012년 김만중문학상 대상 수상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약속을 지켜 바로 남해로 내려왔다. 벌써 9년 전의 일이다. 서울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쳤고, 가식으로 벽을 쌓은 대도시의 생활과 사람들에 환멸을 느낀 지도 오래였다. 도시물을 40년이나 먹었지만, 나는 여전히 촌놈이었다.

남해는 내게 아주 낯선 동네는 아니었다. 번역 일 때문에 몇 차례 내려온 적이 있었다. 금산 보리암에 올랐을 때 해무(海霧)로 가득 찬 남해바다를 바라보며 숨이 컥 막히기도 했었다. 소설을 내고 얼마 뒤 노도에 가 김만중의 적거(謫居)와 허묘를 찾았다. 허묘 앞에서 나는, 당선되면 당신처럼 남해에 내려와(?) 줄창 글만 쓰다 죽을 테니 도와달라고 빌었다.

트럭에 책과 짐을 싣고 노을이 머리를 적실 무렵 남해읍에 닿았다. 얼마 동안 읍에서 원룸을 빌려 살다 물건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좀 더 시골 정취가 나는 곳에서 살고 싶었나 보다.

물건마을은 한적한 농촌 분위기를 물씬 풍겼고, 몇 분만 걸어가면 둑처럼 늘어선 어부방조림이 있었다. 골목길을 굽이치다 숲을 지나면 나오는 물건항. 아침마다 조약돌을 집어 물수제비를 날리며 나는 그 날의 첫 해와 인사를 나누곤 했다.

푸른 바다와의 대면에 익숙해질 무렵 등을 돌리면 멀리 산등성이로 짙은 주홍색 지붕을 인 집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독일마을이 보였다.

물건항과 독일마을 / 유화 / 72X50cm
물건항과 독일마을 / 유화 / 72X50cm

독일마을은 내가 내려오기 전부터도 명소로 널리 알려졌지만, 나는 그 존재를 전혀 몰랐다. 그래서 신선했고, 한편으로 옛 소꿉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대학 졸업 무렵 유학을 가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던 나라, 독일. 남해로 내려와 꿈꾸었던 독일 유학을 이뤘다는 기분이었다. 그때 별 탈 없이 독일로 떠났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Guten Morgen. Meine besten Freunde!
푸른 바다와 항구를 발 아래 두고 주홍빛 독일마을을 어깨에 진 채 나는 겨울 내내 게스트하우스 ‘등대’에 방 한 칸을 빌어 살았다.

무슨 조화인지 그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쏟아졌다. 길마저 끊겨 꼼짝없이 며칠 갇혀 살았다.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버스가 오가는 도로까지 올라가기도 버거웠다. 가본들 도로가 폐쇄되어 빈손으로 내려와야 했지만, 반가운 친구를 기다리는 까치처럼 나는 도로 옆 조그만 가게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까지 그런 폭설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이제는 꿈에 본 나비처럼 아슴푸레 하다. 이따금 찾아가는 물건항과 독일마을은 항상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붉은 꽃다발의 마을이다.
설국(雪國)이 된 독일마을과 물건항. 그 풍경을 다시 만나 그려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나는 소설 <남해, 바다가 준 선물>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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