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맞이하는 오늘이지만 생각과 감정을 넘어 오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수많은 인과가 연결된 가운데 인생 최초와 최후의 순간이 서려 있는, 그래서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볼 수 없을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전체를 도모할 인과로서도 나를 기점으로 부모가 바로 위에 계신 점도 그렇고 후대를 생각해도 자손이 곧 뒤에 존재하게 되니 이 모두가 오늘을 기점으로 형성된 인과이기에 그래서 오늘은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특별한 날임이 분명합니다, 그만큼 처음이자 마지막 자리로 현현될 오늘은 생애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낼 수도 있고 자칫 마음 하나 잘못 먹어 가장 아픈 기억을 남길 그런 순간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을 이끌 순간순간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새겨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오늘에 담을 화두를 선정하는 데도 그 대상을 안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밖에 둘 것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면 좀 더 신중한 행보가 필요하리라 예상해보기도 합니다. 

안과 밖, 이 양자는 사실 우리 삶을 이끄는 중요한 척도이면서 그 의미 이상으로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바깥은 우리에게 필요한 자양분을 제공하는 유형의 공간이요, 안쪽은 그 양분으로서 우리의 의식을 밝고 건전하게 이끄는 무형의 잠재성이 깃든 보고(寶庫)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양자의 역할에 고무적이면서도 어느 측면에서는 우리의 시각과 청각, 촉각은 늘 밖을 향해 있기에 마치 그것이 우리 삶을 이끄는 전부인 양 단정 짓기까지 합니다. 밖은 무한한 우주로부터 인체 피부 표면까지 이 사이를 관통하는 유무형의 질서가 오롯이 인간의 오감(五感)과 직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생명과 직접으로 연결된 공기와 산소와 물, 바람, 이산화탄소와 자연계 에너지의 변동 추이를 주시하며 전자파와 지기(至氣) 에너지 작용과의 교류 없이는 한시라고 살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밖은 그야말로 생명을 도모할 실체라고까지 단정 지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또한, 갖가지 사건 사고와 이들 틈바구니에서 움직이는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고뇌에 솔깃해진 세포의 민감성과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일과 노동의 가치를 준수하기 위한 자구적 노력이 상존하는 가운데 자연과 기후의 변동과 기상이변을 우려하며 환경과 생명의 중요성을 인지해야 하는 것도 밖이 표방하고 있는 구체적 실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밖이 지닌 실상을 인정하면서도 그렇다고 그로 인하여 생겨날 혼돈을 다스릴 내적 세계에 대한 신념을 방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가 번민과 고뇌에 찬 마음을 달랠 여유도 지니지 못한 채 그 수많은 시간을 오직 밖으로 향하면서 나를 찾고자 하였다면 또한 그것이 오늘에서 맞이한 나의 운명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면 그 중심에 이를 본래의 나에 대한 의미를 다시 고찰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미 본래의 나를 경험한 바(어머니 뱃속 열 달의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 바깥의 습관성에서 기이한 것이라면 태초의 본성 자리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안쪽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잠재된 본성을 흠모하며 오늘에서 나를 보아 밝음이 있는지 살피면서, 본성으로 화해 날 이치를 내 안에 천착하고 있는지, 믿음이 절정에 이르러 신의가 오장육부마저 관통할 경지에 이르렀는지, 마음 쓰는 곳의 공과 사를 망각한 체 자신을 드러내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려 하지는 않는지, 내 마음의 진의를 알지 못한 채 욕망과 욕심을 자신으로 아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숙해질수록 자만심을 버리고 자신을 한없이 낮춤으로써 한층 높은 지성을 품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안에서 나를 만나는 일을 오늘의 여는 중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를 일러 공자는 인(仁)의 실현은 나에게 달려있고, 맹자는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으며, 부처는 하늘 위아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고 하였고,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였으며, 수운 선생은 한울을 내가 모시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귀감 되는 말씀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밖에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자리한 본성을 찾는 것이, 인간 본연의 의무요 사명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것이 오늘을 여는 분기점으로 자리매김할 정점이 된다면 우리가 어찌 이를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 심연의 세계에 이를 오늘의 의미가 더욱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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