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공양주 할멈이 오더니 쑥덕거렸다.

큰스님. 얼마 전에 온 스님 행실이 도를 넘어섰습니다. 따끔하게 혼을 내지 않으면 경을 칠 거예요.”

중을 바라보는 세간의 눈이 곱지 않은 시절이었다. 임란(壬亂)을 치른 뒤 여우비처럼 잠깐 호의를 보이던 사대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인심을 돌려세웠다. 산행 때 타고 갈 가마를 대령해라 종이를 몇 축 장만해 바쳐라 성화가 자심한 것이야 으레 그러려니 했다. 절간에 와서 주지육림에 빠져 난동을 부리는 것도 시절인연이려니 여겼다. 헌데 꼬투리만 잡으면 절간을 폐사(廢寺)하려는 수작은 막무가내로 치닫기 일쑤였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몸은 고사하고 목숨까지 부지하기 어려워지는 세상이었다.

하는 수 없이 백운을 불러 앉혔다.

승방에 들어올 때부터 할멈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백운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자욱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낮부터 어디서 곡차를 그리 마신 겐가?”

나름 꾸지람을 담아 내놓은 말인데, 백운은 스스럼이 없었다.

메칠 산 아래 대갓집을 기웃끼리며 시 나부랭이를 주고받았지예. 맻 수 끼적거리 던졌더니 시회(詩會)에 오라 쿠더라꼬예. 시 한 수에 술이 석 잔,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싰더니 취기가 가시지 않았네예.”

백운은 술 트림까지 숨기지 않았다.

그에게 시재(詩才)가 있는 줄은 몰랐다.

천경도 시라면 남의 뒷전에 설 사람은 아니었다. 호기심이 일었다.

그런 재주를 지녔구먼. 어디 시회에서 썼다는 시 좀 보여줄 수 있겠나?”

백운은 대답은 않고 소매로 입만 쓱쓱 씻을 뿐이었다. 말없이 지켜보자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비린내만 진동하는 그깟 못난 기와조각 들을 뭐 할라꼬 절간까지 가져오것십니꺼? 다 저자거리에 내던져 삐맀지예.”

입맛이 씁쓸했다. 시를 지어 술대접을 받았다더니 정작 시는 손에 쥐어져 있지 않았다.

시가 부처님 말씀에 견줄 수야 없겠지만, 그리 쉽게 버릴 건 또 뭔가? 독경 사는 사이 심심파적 읽을 수도 있을 텐데.”

그러자 겁 없이 천경을 꼬나보던 백운이 한 마디 던졌다.

그러시몬 소승이 바로 써 드리지예.”

백운은 옆 다탁에 놓인 지필묵을 집어 가더니 벼루에 먹을 북북 갈았다. 그리고는 쓱쓱 종이 위에 거침없이 붓을 휘둘렀다.

한두 수 적나 했는데, 종이를 서너 장 채우고도 백운의 붓놀림은 멈추지 않았다. 거꾸로 보이는 글자들을 주섬주섬 챙겼을 뿐인데도 천경의 등 위로 찬 바람이 몰아쳤다. 유자(儒子)라 자처하는 이들의 위선과 탐학(貪虐)을 비아냥거리는 시구들이 그의 시에서 꿈틀거렸다.

그런 시를 쓰고도 아무 탈이 없었단 말인가?”

웬걸요. 물팍을 탁치며 파안대소, 오랜만에 보는 사자후라 카던데예.”

백운은 득의에 찬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함께 시를 주고받았다는 사람은, 시에 대해 겉멋만 든 하수든가 내용은 눈감아주고 시재만 높이 산 고수든가 둘 중 한 부류였다.

말문이 막혀 염주만 돌리던 천경이 백운 앞으로 간 지필묵을 당겨 왔다.

소매를 걷고 붓을 들었다. 텅 빈 하얀 종이가 드넓은 하늘이 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구름이 걷히자 천경은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金沙桃李晩風開 詩客慇懃訪我家

師帶煙霞身外濕 吾携桂杖掌中擡

曾從紫陌三衣破 獨坐靑山萬慮灰

滿囊千篇無道益 不如巖下養牛廻

그리고 끝에 제목을 달았다. <백운에게 차운해 주다(次贈白雲)>.

종이를 돌려 건네자 백운이 한동안 응시했다. 입술을 달싹이며 곱씹더니 이윽고 그 뜻을 풀어나갔다. 거짓말처럼 사투리가 사라졌다. 그 음성은 마치 현실과 자기를 저만큼 멀리 두고 사물을 관조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금 모래사장에 도리꽃이 저녁 바람에 피더니

시 짓는 나그네가 은근히 우리 집을 찾았구려.

스님은 안개와 노을에 젖어 온몸이 축축한데

나는 주장자를 들어 손에 쥐고 있노라.

그대는 일찍이 저잣거리를 헤매다 가사가 다 헤졌지만

나는 홀로 청산에 머무노라니 온갖 생각이 재가 되었지.

바랑 가득 시를 채웠어도 깨침에는 보탬이 되지 않으니

바위 아래서 소를 기르다가 돌아오는 것만 못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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