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명이 태동하는 봄입니다. 이를 예측이나 한 듯 주변 산야는 온통 봄을 상징하는 새 생명이 움을 띄우기 시작합니다. 얼마 만에 맛보는 봄기운입니까? 유달리 길기만 하였던 지난겨울 여전히 가시지 않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봄이 오는 길목에서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계절이 순환하는 가운데에 어김없이 찾아든 봄은 예전과 다름없이 약동하는 기운으로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하지만 밖으로부터 도래할 봄기운을 맛보기 전에 지금 우리가 감내해야 할 봄은 여전히 우리의 숨결을 부자연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봄은 왔건만, 봄의 기운을 편하게 느끼지도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러한 아픔을 극복하면서 생명이 약동하는 봄기운을 제대로 누려보려면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지혜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그러한 연장선에서 지금까지 누려왔던 봄의 향취를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키워보면 어떨까요. 

다시 말하면 내면에 잠자고 있는 본성이 깃든 순수의 씨앗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순수를 내면에서 일깨우는 방편에서 씨앗처럼 소중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내면에서 씨앗을 발화시키는 일, 바깥의 장황한 세계에 유혹당하지 않고 내면에서 순수 씨앗을 탄생시키는 일이야말로 바이러스를 예방할 합리적 방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봄을 상징할 씨앗에서 가장 의미 있을 사랑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태아본능이 살아 꿈틀거리는 어머니 뱃속 열 달의 추억을 연상시키는 것만큼이나 순수사랑이 담긴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자연미 넘치며 어떠한 물욕, 야망, 욕망에도 물들지 않는 순수 본능의 자리입니다. 

모든 생명은 이러한 본능을 지니고 있으며 한층 높은 수준으로 진화할 수 있는 것도 그 바탕에는 이러한 순수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수로부터 시작된 입자가 동(動)하고 정(靜)하면서 입자와 교류하고 씨앗이 발화 성장하기까지 세상 전체가 한 생명을 잇기 위해 협력 상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순수를 경험한 이상 그 어떤 물욕이라도 허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 할 사람이 순수 씨앗을 양(養)하는 일에 소홀히 한다면 그 결과는 전체질서마저 혼돈케 할 정도로 심각한 양상을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개인 자격 설에 기준하여도 거력(巨力)의 중추라 할 순수를 담아내지 못한다면 그의 주변에는 설사 위장을 하더라도 진실을 알아차릴 정도라 하니 그 실상이 오묘하기까지 합니다. 생각만 하여도, 느낌만 지녀도 온 생명이 이를 공유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바탕이 될 순수 씨앗의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차원이라면 우리는 순수 씨앗의 영적 가치를 논하는 데 조금도 소홀히 하여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이처럼 순수 씨앗이 발화하는데 전체 자연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기에 그 생명을 보듬을 대자연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은 욕구 발산이나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태동케 하는 부모와 같은 존재요 어머니의 살 같이 공경으로 모셔야 할 존재입니다. 사람의 단편적 의식으로 아무 죄책감 없이 자연을 훼손한 결과가 오늘의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가름해보면 좀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맑은 공기와 쾌적한 환경이 사라지니 온갖 괴질이 범람하게 되고 이는 다시 더 무서운 변종 바이러스를 양산할 기미마저 보입니다. 자연은 사람의 욕구에 의해 훼손당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욕구를 순화시킬 가장 사랑해야 할 존재입니다. 

만약 사랑 부재를 충동으로 갚으려는 무의식적 본능을 자연에 적용하려 한 결과가 방편적으로 파괴, 절단, 부정, 죽임에까지 이르게 하였다면 그 귀결점이 결국 인간에게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을 유념하여야 합니다. 결국, 사랑 부재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양산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의 정도에서 결핍 증세가 있다면 그것의 대부분은 어린 시절에 갈망하던 사랑과 인정 욕구의 부재가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가까운 대상이라 할 부모나 형제, 자매간에 있었을 편애 역시 그렇습니다. 

만약 이것이 해소되지 않은 체 성장하였다면 마음에는 분노와 함께 가혹성이 자리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한 생각이 분노에 젖어있으면 온 세상이 분노에 젖게 되며 이러한 양상은 생명의 유기적 관계에서도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사랑을 담아낼 여력에서 장애가 될 증오나 분노가 있다면 왜 그러한 감정을 지금까지 지니고 있는지 또 그러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피면서 해소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사랑을 담아낼 방편에서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뭇 생명을 사랑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싹을 피우는 춘삼월, 그 역동성을 상처받지 않게 잘 키워내는 일은 세상의 온갖 질병을 치유할 요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방편에서 봄을 상징할 씨앗에 순수사랑을 담아내는 일은 전체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더욱 실감 나게 합니다. 따뜻한 봄날, 우리에게 부여된 순수사랑을 바탕으로 동고동락, 상생 협력의 활동을 쉼 없이 전개할 때 그 의미만큼이나 아름다운 봄은 우리의 가슴에 완연히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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