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작가 김은진 향우
보리작가 김은진 향우

세계적 대유행 팬데믹 ‘코로나19’ 사태는 전 국민을 어려움에 빠뜨렸다.
그중 문화예술인들은 공연, 전시를 할 수 없고, 설사 하더라도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관객과의 만남이 원활하지 않아서 더욱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다. 
이런 난관에도 지난해 개인전 2회를 비롯해 총 10회의 작품 전시로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보리작가 김은진(고현) 향우가 한때 ‘경남의 명동’으로 불렸던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 창동예술촌 아트센터에서 <창동, 봄을 열다> 전시에 참여하고 있어 그녀를 만나 그동안의 근황을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

▲작가님을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저는 고현면 대사마을에 태어나서 고현초교, 고현중, 남해여고를 졸업하고 경남대학교 산업미술학과를 졸업했어요. 창신대학교 지도교수로 12년을 근무하다 이곳 창동예술촌에 2012년 입주해 지금까지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보리작가 김은진입니다.

▲어릴 때부터 꿈이 미술에 관심이 많았거나 예술가가 되고 싶으셨나요? 
= 처음에는 서예를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붓을 잡게 되고 자연스럽게 문인화, 서양화를 그리면서 동아리 활동도 미술반을 했지요. 제가 대학을 입학하던 때 마침 산업미술이 부각되면서 대학을 산업미술학과에 진학했고 온갖 미술분야는 다 공부했던 것 같아요. 대학원에 가서 논문을 쓰다가 도자기에 꽂혔는데 처음에는 재료를 가져다 쓰는 정도였어요. 사실 저는 보리를 표현할 수 있으면 그것이 그림이 됐던 조각이던, 도자기이던 모든 재료를 이용하죠. 보리항아리, 달 항아리가 유명해지면서 도예가라고 소개되기도 하지만 ‘보리작가’라는 말이 제일 정확한 표현입니다. 

대통령상을 수상한 황금보리 달항아리
대통령상을 수상한 황금보리 달항아리

▲작가님에게 보리는 어떤 의미인가요?
= 보리는 바로 나 자신이죠.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우리나라가 문화예술 민족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 피카소 작품이 전국에 전시되고 추상화 열풍이 불었죠. 그런데 저는 추상화가 어렵고 이해가 되질 않았어요. 마침 좋은 기회에 국비로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됐는데 지도교수님께서 서양과 동양은 언어 순서가 다르니 사고체계가 다르고 문화 습득에서 차이가 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어요. 그때, 내가 할 줄 아는 거, 제일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죠. 어떤 작업을 하고, 작가가 될 것인지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때 어릴 때부터 봐 왔던 우리 순수 토종식물인 보리가 떠올랐죠. 한라에서 백두까지 자생할 수 있는 식물인 보리는 제가 씨 뿌리는 것부터 수확까지 전 과정을 다 알고 있고, 보리 종자 종류까지 모두 알 정도로 친숙했어요. 그래서 저의 모티브를 보리로 정했어요.
스토리텔링이라고 하죠? 저는 예술의 종류가 아니라 주제를 <보리>로 먼저 정하고 보리작가로, 그림을 그리고 도자기를 만드는 등 보리정신으로 예술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장르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보리작품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시기도 하셨는데요, 어떤 작품이죠?
= 광복 70주년을 맞아 제19회 대한민국통일미술대전’이 열렸는데 그때 출품한 ‘황금보리 달 항아리’가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어요. 한반도 전역에 재배가 가능한 ‘보리’를 통해 남북의 분단을 한민족으로 연결해 주고, 보리의 꽃말인 ‘일치단결’의 의미로 평화통일의 의지를 표현했다고 해서 높은 점수를 받았던 것 같아요.

창동 보리공방을 찾은 이윤원 재부향우회 직전회장과 함께
창동 보리공방을 찾은 이윤원 재부향우회 직전회장과 함께

▲재부남해군향우회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 네, 2007년 제가 창신대학에 근무 할 때 재부남해군향우회 로고를 제작했어요. 제54대 회장님이셨던 이윤원 회장님께서 당시 재부향우회 임원으로 저를 찾아와서 부탁을 하셔서 만들었지요. 로고에는 우리 선배님들은 배를 타고 남해서 부산을 왔는데 지금은 다리를 건너서 남해를 간다는 의미를 담은 배와 다리의 형상, 앞 세대와 후세대를 연결하는 갈매기, 영원한 젊음과 부(富)·상생을 의미하고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바다를 표현했지요. 지금까지 잘 활용하고 계셔서 제가 더 흐뭇하고 뿌듯합니다.

▲창동예술촌 첫 입주 작가시던데 이곳에 정착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 대부분의 원도심이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어요. 이곳 창동도 그랬는데, 마침 지역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예술이 접목되면서 예술촌이 생겼어요. 창신대학교에 있을 때 산학협력단 연구원으로 참여했다가 참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었고 저의 주제인 보리정신을 심화발전 시켜서 궁극적으로는 나의 세계를 만들고, 완성시키는 것이 목표여서 2012년 이곳에 입주했죠. 창동예술촌은 순순한 창작공간뿐만 아니라 예술과 타 장르 사업과 융복합개념을 실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교육사업, 문화아트상품개발 등 작가로서 실용적인 작품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입니다. <보리도예공방>은 제가 작가로 입문할 때부터 모은 작품이 모두 모여 있는 곳으로 30여년 된 작품도 있는 저의 예술창작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코로나19로 많은 예술인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럼에도 지난해 전시회를 10회나 여셨다고 들었어요.
=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예술, 공연 모든 행사와 전시가 취소됐어요. 그때도 저는 꿋꿋하게 전시회를 열었는데 당시 ‘네 자식이 죽었어도 전시회를 할꺼냐’는 악플을 엄청 받으면서도 한 번도 작품 전시를 멈추지 않았어요. 제가 미술심리치료 1급 상담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데 예술은 인간의 감정과 정신을 위로하는 장르라고 생각해요. 그럴 때 일수록 사람에게 위로와 치료가 필요하고 그래서 빨리 그 상황을 극복하도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코로나로 힘든 지금도 진정한 예술 치료가 필요한 때라고 봅니다. 지난해 1월 12인 달력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개인전 2번, 전시회 8번해서 총 10회의 전시를 했어요. 저는 문화예술을 하지 않으면 몸이 나아도 정신이 황폐하다 생각합니다.
 
 

보리공방에 진열된 작품들
보리공방에 진열된 작품들

▲앞으로 계획이나 포부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 개인적으로는 오랫동안 건강하게 보리작가라는 이름으로 내가 추구하는 예술의 방향을 좀 더 깊이 있고, 좀 더 완성도 있게 작품 활동을 해서 제가 죽어서도 저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힐링이 되길 바랍니다. 
 사회적으로는 우리 민족정서가 굉장히 아름답고 풍요로운데 점점 메말라가는 것이 안타까워요. 물질은 풍요로운데 왜 정신적으로는 점점 피폐해 지고 있는지, 우리가 좀 더 문화예술에 관심을 갖고 작품을 통해 위로를 받으면 우리 사는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아름다운 세상은 작가인 저만 꿈꾸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노력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동참했으면 좋겠어요. 비대면 시대에 맞게 지금은 SNS를 통해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으니 같이 공감하고 공유해서 많이 힐링하고 위로받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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