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3·1절이 다가오면, 암울했던 일제저항기의 독립투사들이 떠오른다. 독립의 터널마저 없었던 그 시대에 목숨을 건 선각자들의 독립투쟁이 있었기에, 우리는 독립이란 햇살과 마주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주권을 행사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현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역사적 진실은 미화시켜서도 왜곡되어서도 안 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어야 한다. 왜곡된 역사는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남해의 3·1독립만세운동의 기록도 잘못된 부분이 있어, 최근에 이를 바로 잡게 되었는데 그 경위 내용을 요약하고자 한다.

향토사학자 김성철(남해 3·1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남해 역사 3·1독립운동에 대해 “4월 2일, 이예모가 하동군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동지를 규합, 4월 3일 오후 설천면 남양리 노상에서 궐기를 시작하여 남해읍으로 향하던 도중에 고현면장 김치관의 밀고로 좌절된 것”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4월 3일의 기록은 어떤 역사적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도리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기미년 대한독립만세사건 재판소 판결문>에는 이예모와 유찬숙에 대해 “4월 2일 밤 남양리 설천면 문항리 노상에서 다수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여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위해서 치안을 방해한 자들”이라는 판결을 했다. 이런 사실을 근거하여 볼 때 남해군민들이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4월 3일이 아니라 4월 2일 인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2일 저녁, 설천면민 100여명이 문항리 신작로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남양리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입니다.” 라고 2019년 2월 28일 지역신문에 글을 올린 바 있다.

필자 역시 2019년 2월 19일 지방신문에 남해 3·1운동 독립운동 애국지사 정임춘 선생에 관하여 기고하였다 그리고 진양정시 문중에서는 정임춘 증손자 정영철 부인인, 김경은金慶恩(남해군 설철면 강진로197-1 <문항리 377>)은 사단법인 대한민국 순국선열 유족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순국 2019 3월호(통권 338호)’에 ‘남해 3·1독립운동 100주년 맞아 재조명’이라는 제목으로, 진주예심종결결정서(1919.7.15.)와 대구복심판결문(1919.9.23.) 전문 등 각종 자료사진과 함께 16쪽에 걸쳐 특집으로 기고하였다.

이러한 자료와 사실들에 근거하여 남해군은 2019년 3월 1일 3·1절 100주년 기념식에서 종전에는 이예모 선생 손자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는데, 정임춘 선생 손자 정상용이 낭독하였다. 
하미자 남해문화원장은 경과보고에서 당시 주역 17명을 일일이 호명하였다.  
장충남 군수는 기념사에서, 우리 남해도 그 해 4월 2일, 동학정신을 이어 받은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설천면 문항에서 면민 100여명이 모여 남양까지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이틀 뒤인 4월 4일에는 남해시장에서 각 면의 장꾼들까지 가세한 만세운동을 벌였다고 강조하였다. 남해 3·1만세운동사를 새롭게 기록한 원년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고자 2021년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소장 박성석)에서 남해항일독립운동사 편찬을 위해 자료 수집 중, 지난 1월, 3·1운동 주역이었던 정몽호 선생의 활동상황과 옥고담(獄苦談)을 손으로 직접 써서 남긴 육필원고를, 아들 정창주 박사(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장 90세)로부터 받았다. 남해읍 남산에 3·1만세 기념비건립 공동회장(김성오, 홍남식, 정재홍) 중 한 분인 정재홍 선생 육필원고(복사본)도 추가되었다.

새로 쓰는 남해 3·1독립만세 운동사에 보물같은 자료를 찾아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하여 남해의 3·1독립만세운동 요약 기록해보면 다음과 같다.

1919년 3월 하순 경 남양리에 거주하는 지방유지 이예모(장수 이씨)에게 천도교 진주교구로부터 남해군도 이에 호응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는 제일 먼저 문항리 친척 정임춘(부인 장수 이씨)을 찾았다

독립선언서를 받은 정임춘은 문항마을회관 자리에 있었던 한문서당인 문항강명제(文杭講明齎)를 찾아갔다. 이 서당 출신인 문항마을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등을 불렀다. 한학선생 정상기 선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보고 숙의 한 후, 전원이 동참할 것을 다짐하였다.  
설천면민들은 4월 2일 오후 6시, 문항리 솥곡 신작로에서 그들을 주축으로, 100여명이 집결하였다. 군중들은 목청껏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면 소재지인 남양리로 행진하면서, 연도의 부락민들과 합세하였다. 이것이 남해군의 독립만세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남해읍 장날인 4월 4일 남양리에서 출발하였다. 정임춘, 정순조, 정몽호 등이 선봉대장이 되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오전 10시경 고현면 도마리를 경유하면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조선독립만세를 연창(連唱)하였다. 남해읍에 이르렀을 때는 군중이 700여명에 이르렀다.

남해읍 시장에 도달한 일시는 4월 4일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시장에 모였던 각 면의 시장꾼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받아 들고, 소리 높여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정임춘은 정순조, 정학순을 앞세우고, 동지 20여명과 함께 남해군청 뜰 안을 가득 메웠다. 이때 정순조는 태극기를, 정용교는 몽둥이를 들고 군수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소리치면서, 군청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군수는 물론 군청직원도 이를 제지하지 못하고, 군중의 요구에 조선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그 이튿날에 삼천포경찰서에서 경찰대와 수비대 수십 명이 완전 무장하고 남해자주독립만세 주동자 17명을 모조리 체포하여 삼천포서로 연행(連行)해 갔다. 그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1919년 6월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 송치되었다. 1919년 7월 15일 정순조 정임춘 정흥조, 하준호,와 함께 주모자로 3년 언도를 받고, 정용교, 유찬숙, 정학순, 윤주순 등 대부분 2년형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다. 그 중 정학순은 옥사하였다. 삼가 명복을 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