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해 찬  남해군선거관리위원회 선거주무관
정 해 찬
남해군선거관리위원회 선거주무관

사회적 지위가 제법 있어 보이는 사람이 수행원인 듯싶은 일행 몇몇을 데리고 갑자기 회식을 하고 있는 우리 테이블로 와서 느닷없이 인사를 건넵니다. 어색한 미소에 자신이 아무개라고 말하고는 참석자와 일일이 악수를 하는데 우리 일행은 갑작스런 분위기에 선뜻 거절을 못하여 얼결에 인사를 받아들이고 맙니다. 그러나 이 낯선 이와의 악수가 끝나고 우리 일행의 이목이 쏠리고 나면 그는 정작 아무 말도 없이 의례의 덕담 비슷한 것을 몇 마디 내어놓고는 태생이 싱거운 사람마냥, 차마 고백을 못한 숫기 없는 사내마냥 더 아무 말도 못하고 다른 테이블로 옮겨가 같은 행동을 다시 반복합니다. 그때의 분위기란 사뭇 기괴한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무척 익숙한 일입니다. 바야흐로 선거철인 것입니다.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왜 우리와 악수를 하였는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이번에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으니 저를 지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심전심이라 상황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만 그의 어색한 표정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요, 뜻밖의 악수는 지지 호소를 위한 팬터마임일 뿐입니다. 그러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우리가 쉬이 알지 못 하듯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옆 테이블로 간 까닭 역시 일반인이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겪어 봤지만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이 익숙한 사연은 다름 아닌 선거기간이 아닌 때에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는 공직선거법 때문입니다. 선거운동은 “당선되게 하거나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위”로 정의하고 있고, 선거운동은 몇 개의 허용된 방식을 제외하고는 선거운동기간 전에는 할 수 없도록 하고 있기에 그가 지지 호소를 입에 담았다가는 선거운동기간 위반죄에 해당하여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옥외 장소와 확성장치를 사용해서는 안 되는 등의 방법상 제약은 있지만 직접 말로써 지지를 호소하는 방식의 선거운동은 이제 선거운동기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당연한 거 아니었냐는 소리가 벌써 귓가에 울리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선거를 돌이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선거운동이란 후보자의 로고송이 얇은 창문을 흔드는 일이며, 색을 맞춰 입은 선거운동원이 대로변에서 막춤을 추는 일이었습니다. 인지도 대결에만 함몰된 선거 문화는 권력과 금력으로 더 많은 인력을 동원하는 경쟁의 장으로 변질되었고, 법은 선거의 자유를 크게 희생하면서까지 선거의 공정을 담보하는 방식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직접 말로써 지지를 호소하는 선거가 가능해졌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선거는 인지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회적 합의가 가능해졌다는 것을 뜻하고 이는 시민사회의 민주적 성숙에 대한 신뢰가 비로소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번 법 개정을 통하여 인지도가 정책을 구속하는 게 아닌 정책이 인지도를 담보하는 사회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여러분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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