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70 중턱을 넘어 주변을 둘러보니 가까이 했던 사람들이 소식이 끊기거나 보이지 않고 해질 무렵 노을 진 먼 곳을 보면 왠지 서글퍼지며 지난날이 떠오른다. 특히 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생전에 살갑게 못한 것이 무척 후회스럽다.

나는 초등학교 갓 들어갈 무렵, 당시 남해에는 트럭이 한 대 뿐일 때 조부님께서 유독 나를 태우고 노량 충렬사 돌계단 조성에 다닌 기억이 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계단 입구에는 조부님 기록도 있었다. 이때부터 우리 집안은 노량(이순신 장군)과는 인연이 있어 신동관 전 국회의원께서 남해대교의 대역사를 이루면서 국도(제19호) 승격과 함께 이락사, 충렬사를 사적으로 승격시켜 국비로 관리토록 하여 오늘날 ‘이순신 순국공원’으로 이어져 왔다. 

한편 외가의 증조부님(최효석)께서 1910년 난음리 비자당에 사립동명학교를 설립한 것이 오늘의 이동초등학교이다. 이동초등학교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님을 비롯, 고인이 되신 조주영 체신부장관, 최치환 국회의원, 김일두 검사장, 최익명 남해고등학교 재단이사장님을 배출한 최고의 명문학교이다. 
외증조부님께서는 민족주의자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수제자로 이동초 100년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친조부님(이시봉)께서는 지금의 다초초등학교 부지를 제공하였고, 지금의 이동 장평소류지(사진) 건립에 기여하여 벚꽃나무 아래 큰바위에 공적기록이 남아있다. 조부님은 자수성가로 이동 다초리에 양조장과 남해읍 차산리에 도정공장과 염전을 하였고, 그런 재력으로 숙부와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하게 되었다. 예전에 선소와 차산리 일대에 토마토 재배가 많았던 것은 아버지께서 남해공립농업중학교(5년제, 현재 남해중·제일고) 교감으로 최초로 남해에 토마토를 재배 보급한 때문이다. 강창호 전 재경향우회 회장님이 아버지의 제자로, 함께 납북되다가 탈출했기에 나를 볼 때마다 안타까워했었다.

어릴 때 선소에서 해수욕하고 배가 고파 토마토 서리를 하다가 붙잡혔는데, 주인이 나를 알고는 “야 이놈아! 달라고 하지 그랬냐”며 한아름 줘서 고(故) 김영태 전 군의회의장과 먹은 기억이 난다. 이런 DNA도 물려받았는지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청와대에 근무 할 때에 많은 향우와 지인들을 도울 수 있었고 남해 최고층 현대APT를 지어 어머니께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실 수 있었다. 노량 관음포에 이순신·등자룡 장군 유허비를 설치하는 것은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서울에 정착해 45년을 살아온 제2의 고향 서울 용산 동부이촌동 한강맨션 재건축에는 최대 걸림돌이던 공유부지 해결에 마중물을 부었으니, 큰 벼슬은 못했지만 나름 사회에 기여하며 살아온 것 같고 설을 앞둔 탓인지 고향이 더욱 그리워진다. 

최근 남해군에서 근대문화 유산적 가치로 남해대교 관광자원화사업을 한다는데 참 좋은 기획이다. 돌이켜보면 1973년 여름 남해대교 개통 20여일 앞두고 청와대 경호실 요청으로 남해 현지에서 청와대 경호 선발대, 정보처 등 요원들과 함께 지낸 가슴 벅찬 개통식 상황이 생생하다. 

이제는 밝힌다. 당시 ‘남해각’은 평소 도움을 주었던 해태제과그룹(박병규 회장)에서 명칭은 ‘해태각’으로 하고 신동관 의원의 개인소유권을 주겠다고 제의하였으나, 일언지하에 대통령각하를 모독하느냐며 화를 내고는 ‘남해각’으로 하고 남해 농수산물과 해태제품을 팔고 남해인을 고용하다가 후일 행정절차로 남해군에 기탁하라고 하고는 해태와 단절하였다. 뒤돌아보면 신동관 의원께서는 오직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고향남해’ 이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박 대통령께서도 용인했기에 가능했던 청남 신동관 선생은 남해의 보물이셨다.

남해군민·향우님들의 건행을 빌며 고향 남해가 전국 최고의 고장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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