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속도가 더없이 빠릅니다. 이러한 속도감을 감지할 수 없다 하더라도 변화의 추이는 우리가 늘 경험하고 있습니다. 과거 무선 호출기 삐삐가 출시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제품이라 하여 주목받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하지만 불과 수개월 사이에 핸드폰이 등장함으로써 삐삐의 잠재적 수명이 단명에 그친 사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과학 문명의 정보나 기술력이 그만큼 높아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새로운 최첨단이고 기존의 것을 능가하는 신제품이 끊임없이 출시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당장 그 실체를 느낄 수 있는 현상은 지금도 쉽게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의 진화가 그렇습니다. 

이제는 5G 폰이 출시되고 있으니 첨단 기기의 변화는 가히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변화와 함께 지금까지 여겨왔던 가치관마저 바뀔 정도로 변화의 폭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즈음 인문학의 열풍이 그렇고 나는 누구이냐며 자신을 알고자 하는 부분에서도 이러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지금까지 가장 중요하게 여겨왔던, 먹는 것의 의미를 넘어서는 엄정한 변화의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내적 세계를 추구하려는 열망이 일반화되었다고 할까요. 다시 말하면 유형의 이익 못지않게 무형의 정신영역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는 흐름입니다. 

이러한 시대를 가감할 때 먹는 것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쪽으로 패턴이 바뀌는 기류는 이미 예상된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대의 흐름이라면 이러한 요건에 부응할 수 있는 장르를 개발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르도 명상이나 수련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미학을 접목함으로써 새로운 양상으로 변모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藝)와 악(樂)과 심(心)으로서 인간의 감성을 자극할 때라야 비로소 심성을 온전하게 다스릴 수 있듯이 말입니다. 물론 사람의 정신력을 높이는 방법을 찾는다면 종교에 귀의한다거나 명상과 같이 고요히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물 들은 습성을 단 며칠 사이로 바꾼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감성과 미학이 함께해야 하고 감동을 이끌기 위한 이미지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야 합니다. 종교마저도 원래의 역할에다 예악(藝樂)을 가미함으로써 순기능의 역할을 한층 강화할 정도이니 이것만 보아도 이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어느 정도로 감지하고 있을까요. 정신을 새롭게 한다거나 영혼을 밝힌다는 것에 부담을 느껴 시도해보기도 전에 포기하기보다 아주 가까운 생활 터전에서 아름다움을 스스로 창조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굳이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더라도 감성만 있다면 작은 돌 하나라도, 버려진 장독 하나라도 얼마든지 시선을 끌 수 있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예 예술에는 소질이 없어, 이런 것은 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며 극구 부인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움을 창조할 능력이 있지만 나타내기를 꺼리는 것은 너무나 인위적인 방편에 굳어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 내가 제일 잘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경쟁과 출세라는 측면만을 생활에 반영하다 보니 이러한 감성이 아예 무시당한 일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들도 해맞이하거나 해가 지는 모습을 볼 때면 무의식적으로 아! 참 멋지다, 참으로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장면이라고 감탄하듯이 본능적 미감은 누구에게나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색상에 무지한 듯하지만, 시장 옷가게에서 옷을 고를 때면 색상을 보는 시각이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로 예민합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 미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심리적으로도 미감은 마음을 움직이는 데 관여하고 있습니다. 

만약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는 장소에 예쁜 꽃을 심어두면 과연 쓰레기를 함부로 버릴 수 있을까요. 미학의 본능을 간직한 사람의 심리는 아름다운 곳을 함부로 취급하거나 더럽히지 않습니다. 이러한 미학을 견지할 때 얼마 전 필자가 참가한 건천마을 꾸미기 작업은 특별한 의미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남해군 미술협회 회원이 중심이 되어 갯벌이 펼쳐지는 건천마을 초입에 바다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그림과 조각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꾸미고 설치하는 작업을 통하여 바다 갯벌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본다는 차원을 넘어 그 마을에 가면 무언가 특별함이 있다거나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거나 다시 찾고 싶다는 욕망으로 연결된다면 그 가치는 엄청날 것입니다. 

만약 변화의 축에서 본 미와 예의 가치가 크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당장 여기에 머물러서도 안 될 것입니다. 정녕 변화를 원한다면 질의와 문답을 통하여 우리 마을은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할 무엇이 있을까? 기존의 것에 안주하지 않고 더 새로운 것을 창안하려는 열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참신한 아이디어가 제대로 발현될 수 있는가? 아니면 수 세기 동안 흘러온 농경시대의 습성이 변화의 길목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마을의 변화 가능한 특징은 무엇인가? 이미지 시대에 알맞게 흉물스럽게 방치된 집들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이 밖에도 간간이 명곡을 감상할 수 있는 넉넉함이라든가, 읽고 쓰고 토론하고 발표하는 독서 모임이라든가, 시를 낭송하고 그림을 그리고 유명인사의 강연으로 지성을 담아내는 시간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탐구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과학이 기술적인 부분을 극대화하는 사이 한층 허전해진 마음을 달랠 수 있다면 그 가치는 남해를 더욱 아름답게 할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