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면에 있는 설흘산 등산을 좋아한다. 나는 주로 선구리 쪽에서 출발하여 응봉산을 지나 설흘산 정상 봉수대까지 오른다. 내 걸음으로 왕복 약 4시간 반 정도 걸린다.
어렸을 때 우리는 이 산을 ‘구름산’이라 불렀다. 우리 동네 사촌에서 올려 보면 길게 뻗은 능선이 뭉게구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설흘산 등산로가 좋은 것은 등산내내 사방에 바다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앵강만, 태평양, 여수만, 멀리 광양만까지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서는 겨울이 아무리 깊어도 봄이 보인다. 바다의 너른 마음 위에 펼쳐지는 은빛 축제는 봄의 기쁨을 넘어 신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남해 바다는 언제나 봄이다.
등산길 가에 앉아 있는 마삭줄과 달개비와 키 낮은 나무들이 내게 있는 근심이 얼마나 작고 정겨운 것인지 살펴보라고 지날 때마다 속삭인다. 그렇다. 걷고 싶은 길, 마음 둘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다른 것들은 흘러가도 이런 감정은 내 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될 것 같다.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은 28세 때 벌써 이런 감정을 자신의 일기에 썼다. 
‘풀섶과 나무줄기 사이에서 생명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처럼 고요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이 내겐 너무 과분한 게 아닐까? 분수에 넘치는 사치는 아닐까? 오늘만큼은 복잡한 머릿속을 떠나 내게 베푸는 하늘의 호의를 즐기고 감사하고 싶다’ 
아미엘이 젊은 시절에 느낀 기쁨과 감사를 나는 67세가 되어서야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나에겐 고마운 일이다.

나는 이 길을 걸으면서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산다는 것이 딱 이 정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이름도 날려 보았고, 별별 풍경을 찾아 세계 구석구석 다녀 보았고, 지식과 지성도 나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나를 안심시키지 못했다. 그것들이 작아지고 낮아져 딱 이 정도, 설흘산 등산로가 되어서야 내가 안심된다. 높은 곳에서는 내려오고 낮은 생각은 채워져 내 마음이 세상과 수평이 되고 나서야, 나와 타인이 어깨동무를 하고 나서야 내 일상이 드디어 편해지기 시작한다. 설흘산이 좋은 것은 그것이 늘 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을 들면 보이는 산처럼 길을 나설 때마다 동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나의 설흘산이다. 그들이 나를 안심시킨다. 그들이 내가 기댈 곳이고 내 삶의 쉼터이다.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의 하루라는 풍경만큼 나에게 아름다운 풍경은 없다. 각자의 길이지만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만큼 나를 채워주고 밀어주고 믿어주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나에게 남해란, 그런 곳이다. 가지 않아도 보이고, 오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설흘산 등산길이다.
안심되는 행복을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마을마다, 시장마다, 일터마다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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