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을 낚다
근원을 낚다
  • 남해신문
  • 승인 2020.12.1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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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시원인 바다
바다는 태초 생명의 시원입니다. 최초 단세포 입자로부터 시작된 생명은 물에서부터 위대한 웅트림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를 보면 아마 우리는 소금기가 들어있는 양수와 같은 속성의 바닷물에서 진화해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일체 생명은 물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바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다의 중추라 할 심연의 세계를 탐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무한한 힘이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근원 자리입니다. 

생명의 모든 것은 근원의 자리로부터 파생되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다의 외형에만 치우친 나머지 이 근원의 자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합니다. 삶의 바탕이 생존이라는 측면만 부각하다 보니 존재의 가치와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는 무지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부의 근원 자리,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양육하는 지혜가 샘솟고 있습니다. 

이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느껴야 합니다. 삼삼오오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행의 모습에 동화된 듯 갈매기도 키웃 키웃하며 신호음을 보냅니다. 마치 근원에 이를 기쁨을 예상하기나 한 듯이 말입니다. 근원으로부터 시작되어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자리에서 바다를 만났습니다. 어제 본 바다와는 완연히 다른 바다입니다. 바다는 빗물과 만나고 그 바닷물은 다시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비로 변하여 바다를 적시는 순환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와 지금을 잇는 바다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여전히 절제된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욕심도 욕망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순화된 모습입니다. 이 절제의 감각에 고무될 무렵 어린 시절에 만났던 구름 꽃 핀 하늘과 교우합니다. 

예와 지금의 바다
옛날 생각이 문득 떠오릅니다. 아주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여수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배로 다니던 때입니다. 종착지가 여수이긴 해도 남해 역시 마지막 도착지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약 일곱 시간의 긴 바다 여행의 지루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특히 그 긴 시간 동안 삼등실 지하 방에 몸을 싣고 있으면 오르내리는 배의 요동에 몸서리치듯 해댄 멀미를 생각하면 몸서리치기까지 합니다. 지금은 육로로 통행합니다만 그땐 배를 한번 타려면 배 시간에 맞춰 이른 새벽에 짐을 싸 들고 노량 부둣가로 향하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한여름이면 그래도 견딜만 합니다만 엄동설한 추운 날이면 세찬 바람에 얼굴마저 얼어버릴 정도의 추위에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그로부터 반세기에 이르러 문명은 급속히 발전되고 어릴 때 겪었던 바다에 대한 기억은 무의식 속으로 잠행될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억인자 속에서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바다를 만날 때면 어떤 형태로든 상기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가는 것은 반드시 돌아오고 오는 것은 또한 가게 마련입니다. 이 가고 오는 사이에서 과거의 일이나 미래의 일이 모두 지금이라는 초유의 시간에서 어떤 형태로든 다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의 노량 바다에서부터 꽁치 낚시하는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가 비록 멀고 길다 해도 예나 지금이나 바다는 그대로일 뿐. 마음으로 치면 그때 먹었던 그 마음이나 지금의 마음이나 그 작용은 무게도 없고 양도 없는 영혼의 입자 그대로입니다. 그 모든 관점이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로 이를 이날 이때가 최초요 최고이며 의식이 절정에 이를 최대의 순간입니다. 이런 까닭에 지난 과거의 일이 아무리 가슴을 아프게 하더라도 이 순간 나의 영혼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용서하고 포용하는 마음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근원을 낚다
한나절 내내 드리운 낚시에 집중할 때 문득 기다림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초연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이 순간만큼 아름다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기다림은 인내를 수반하지만 그 이면에는 욕심을 내지 않는 것, 비우는 것, 평정된 심리를 유지하는 요건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기다린 보람인 만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린다는 것, 기다려 보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니 문득 강태공이 떠 오릅니다. 낚시대를 드리운 만큼이나 기다림의 상징으로 기억될 강태공. 아마 그의 기다림 속에는 어떠한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 임전무퇴의 정신이 담겨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기다림을 통하여 더 넓은 포부와 의지를 지니고 원대한 성취를 이룰 꿈을 간직하고자 함은 아니었을까요. 
이를 테면 포기하지 않는, 어떤 난관이 와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신념을 잇듯이 말입니다. 마치 고기를 잘 잡는 비법이란 특별한 재주라기보다 때를 기다리는 초연함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과 같이 말입니다. 이러한 상념에 젖을 무렵 필자의 낚시에도 꽁치가 잡히기 시작합니다. 낚시대를 드리운 지 몇 시간이 지난 사이 낚시대를 조절하는 데 익숙해진 탓일까요. 아니면 기다림을 선택한 초연함이 통한 것일까요. 

하지만 필자는 또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근원을 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마음 안에 저장된 불확실한 감정이 모두 순화될 때까지 말입니다. 이 불확실함은 분노, 부정, 원망, 집착, 욕심, 욕망, 시기, 험담 등을 평생 간직한 습성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평생 간직한 습성을 나의 본 모습으로 착각하여 그 습성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한다면 불확실은 도리어 큰 장애가 되어 자신을 멍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불확실한 감정을 잡아내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흥미가 반감될 것입니다. 어제는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은 또 내일로 연결되는 사이, 그 영혼이 생명 본성인 근원에 이르도록 열정을 불살라 봅니다. 낚시대를 올릴 때마다 근원에 가까워진 마음이 더욱 가벼워지고 있음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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