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향토사 연구로 고려사와 현대사 조명하다
남해향토사 연구로 고려사와 현대사 조명하다
  • 이충열 기자
  • 승인 2020.12.04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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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학술포럼 개최
고려 삼별초, 관음포대첩, 고려팔만대장각판, 남해보도연맹 사건 등 학술성과 발표
‘제2회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학술 포럼’이 지난달 26일 유배문학관 다목적 강당에서 비대면 촬영 방식으로 진행됐다
‘제2회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학술 포럼’이 지난달 26일 유배문학관 다목적 강당에서 비대면 촬영 방식으로 진행됐다

남해문화원(원장 하미자)은 지난달 26일 남해유배문학관 다목적 강당에서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영상촬영 방식으로「제2회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학술 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포럼의 주제는 김성철 전 유배문학관장의 ‘삼별초와 남해’, 서재심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의 ‘정 지 장군과 관음포대첩’, 정상운 남해팔만대장각판 연구가의 ‘팔만대장각판과 호국불교성지 남해’, 한관호 전 경남도교육청 홍보사무관의 ‘남해보도연맹’ 4가지 였으며, 각 주제별 토론회는 박성석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경상대 인문대학 명예교수)를 좌장으로 하고 김두일 전 남해군의원(향토자연구위원), 김향숙 남해문화관광해설사, 임종욱 팔만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 사무국장, 김동규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각각 토론자로 참가해 진행됐다.  

하미자 남해문화원장은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비대면 영상으로라도 군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문화ㆍ학술인들의 연구 성과와 결실을 널리 공유하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며 “남해의 문화를 발굴하고 연구하시는 걸음들이 모이고 모여 더욱 풍성해질 것으로 기대하면서 오늘 발표와 토론이 좋은 결실을 맺기 바란다”고 말했다. 

아래에 이날 발표된 포럼 발제자들의 연구 개요를 요약했다. 

“남해는 고려 삼별초의 활동지” 

김성철 전 유배문학관장은 이번 발제에서 고려시대 몽고에 맞섰던 삼별초의 활동과 남해군과의 연관성을 제기했다. 
이에 따르면 고려시대 최우의 집권기에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자 용사를 모아 매일 밤에 순찰, 단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야별초(夜別抄)>라 했다. 야별초의 규모가 커지자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었고, 몽골에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군사들로 편성된 신의군(神義軍)을 합해 <삼별초(三別抄)>라 했다. 이 때가 최씨 정권 말엽이다. 
김성철 전 관장에 따르면, 삼별초의 항쟁은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서 소멸된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록에 의하면 남해군의 역할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남해군이 변방이 아닌 한국사의 주무대라고 강조했다. 
계속된 김 전 관장에 의하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5월조에 남해에도 삼별초의 수장격인 승선(承宣, 왕을 보좌하는 벼슬)이었던 유존혁이라는 사람이 주둔했고 남해가 진도 용장성에 버금가는 삼별초의 제2 별동부대의 본거지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김성철 씨는 유존혁의 별동대 주둔지가 남해군 서면 서호리 소재의 ‘재앙궁터’ 또는 ‘장군터’(대장군지)일 것으로 보고, 이곳이 삼면이 산맥으로 이루어져 자연 성곽으로 적지이며 지리적으로 서해안과 동해안을 왕래할 수 있는 해로가 가로지르는 곳이라 조공선을 탈취하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추정했다. 아울러 서면 소재 재앙궁터에 남아 있는 성터와 성곽이 진도의 용장성 축조법과 비슷해 삼별초의 은거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 성터가 좁아 삼별초 본진이 정착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 삼별초 주둔지가 서호의 재앙궁터가 아니라, 관음포구가 있는 고현면 일대가 삼별초가 주둔했던 지역이었을 수도 있다는 추정도 함께 내놨다. 
특히 당시 남해는 몽골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안전지대로써 국사가 소장되어 있던 곳이라는 점을 근거로 고려대장경의 판각과 삼별초군 주둔지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관음포대첩은 남해의 소중한 역사이자 문화 자산” 

서재심 연구위원은 ‘관음포만(觀音浦灣)’이 불교에서 불보살을 이르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준말이라며 ‘관음(觀音)’을 ‘소리가 보인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관음포만이 열린 마음으로 소리를 본다는 것으로 수행이 상당한 경지에 오른 사람들의 형이상학적 표현이라고 했다. 
또한 서 위원은 남해 관음포만이 고려시대 팔만대장경 판각지이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의 노량해전이 있었던 성지일 뿐 아니라, 고려시대 정 지 장군의 ‘관음포대첩’이 있었던 곳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정 지 장군의 관음포대첩과 관련해, 본관이 하동인 정 지 장군은 고려말 1383년 해안을 침략한 왜구의 배 120척에 맞서 남해 관음포에서 배 47척으로 대적했다. 불리한 형세의 이 싸움에서 정 지 장군은 “두려운 자 죽을 것이요, 용감한 자는 승리할 것”이라고 병사들을 독려하며 결전을 치러 크게 승리했다. 이 과정에서 정 지 장군의 지극한 기도로 바람이 멎고 비가 그쳐 불리한 형세가 역전되는 기이한 이적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특히 서 위원은 이 관음포대첩에서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가 남해 관음포대첩에서 최초로 사용됐다고 설명했다.  

 

 

‘해인사대장경판’ 정식 명칭은 ‘고려팔만대장각판’  

정상운 씨는 지난 24년 동안 ‘해인사대장경판’ 또는 ‘합천 해인사대장경판’이라고 불리는 국보 제32호의 합리적인 명칭이 무엇인지 연구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서 정상운 연구가는 현재 문화재청이 공식 사용하는 ‘해인사 대장경판’이라는 명칭은 최초 사용자가 일본인 무라까미 류키치(村上龍吉)였다면서 국가적 사업의 결과물을 해안사에서 제작한 것처럼 역사적 의미를 축소하여 부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보 제32호의 또 다른 명칭인 ‘고려대장경’에 대해서도 최초 사용자가 일본인 츠마키 나오요시(妻木直良)이라고 주장했고 세 번에 걸쳐 제작된 대장각판 각각의 명칭으로 부적절할 뿐 아니라 문화재 유산을 ‘경판’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점들을 근거로 정상운 연구가는 국보 제32호 문화재의 명칭이 을사늑약 이후 일본 학자들의 식민사관에 의해 연구되면서 왜곡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울러 정 연구가는 국보 제32호를 <대장경>이나 <대장경판>으로 부르는 것은 맞지 않고 「대장각판」이라고 불러야 맞다고 했다. 정 연구가에 따르면 ‘대장경(大藏經)’은 경전의 경ㆍ률ㆍ론의 형태를 필사하거나 대장각판을 이용해 인쇄되어 책으로 엮어진 상태를 의미하고 ‘대장경판(大藏經板)’은 불경을 대장경 형태로 ‘눈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판각한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대장각판(大藏刻板)’은 대장을 필사한 다음 목판에 뒤집어 붙여서 판각하여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오로지 대장경을 대량으로 인쇄제작할 수 있는 특정한 부분의 인쇄기인 활판을 말한다는 것이 정 연구가의 주장이다.   

“남해보도연맹 희생자 위령ㆍ추모사업 필요”  

이날 한관호 전 경남교육청 홍보사무관은 ‘한국전쟁과 남해보도연맹 학살 사건’이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직후 7월 24일~7월 28일까지 남해군 이동면 복곡 저수지 인근 야산과 강진만 앞바다에서 법적 근거나 재판 절차도 없이 당시 경찰과 관련자들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당한 70~80명 주민들의 당시 실태를 규명하고 국가의 공식 사과와 위령ㆍ추모사업 지원, 역사기록 수정 및 등재 등 사후 조치가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한관호 전 사무관의 설명에 따르면 「국민보도연맹」은 해방 직후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서 과거 좌익에 몸 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다.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남로당(남조선노동당)과 무관한 양민들이 상당수였고 강제 가입된 사람, 단순 동조자, 좌익 경력자가 아닌 사람들이 다수 포함됐다고 했다. 
계속해서 한관호 전 사무관에 따르면, 1950년 6.25 한국전쟁이 터지자 6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특명으로 ‘남로당 계열 및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경기도와 강원도는 6월 하순부터, 충청ㆍ호남ㆍ서부 경남 일대는 7월경부터 대량학살이 시작됐다.  

설명에 따르면 남해군에서는 1949년 12월 9일 보도연맹 남해지부는 자수ㆍ전향자 36명을 포함해  300명이 모여 선포대회를 했다. 이어 한국전쟁 직후 7월 24일 남해경찰서는 각 지서를 통해 보도연맹원 및 관련자들을 검거했고 연맹원들을 소집했다. 남해경찰서로 이송된 이들 중 A급으로 분류된 150여 명이 구금되었고, 이 중 인맥과 돈 등으로 풀려난 사람을 뺀 70명~80명이 27일과 28일, 이동면 복곡과 강진만 앞바다에서 학살당했다. 

남해경찰서에 갇혀 있던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 70~80명 중 33명은 7월 27일 트럭에 실려 이동면 복곡 저수지 근처 야산으로 끌려가 철사로 서로 묶여져 사살된 후 엎드려져 있는 상태로 방치되었다. 또 나머지 30여 명은 7월 27일 밤 강진만 앞바다 선상에서 피살됐고 사체는 바다에 던져졌다. 
당시 경남 경찰국 내무부 치안국의 지시로 남해경찰서 사찰계 등에 의해 소집돼 사살당한 이들과 관련해, 한관호 전 사무관은 법령에 근거하지 않은 구금ㆍ사살 처분, 재판 절차 규정이 있음에도 이를 준수하지 않은 점,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 침해 등을 지적하면서 ▲국가의 공식 사과 ▲희생자에 대한, 국가와 지자체의 위령ㆍ추모사업 지원 ▲희생자의 가족관계 등록부 정정 ▲진실규명 결정을 보완ㆍ추가하는 역사기록 수정 및 등재 ▲군ㆍ경ㆍ공무원과 초ㆍ중ㆍ고ㆍ대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평화인권교육 실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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