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종 욱 남해유배문학관 상주작가
임 종 욱
남해유배문학관 상주작가

이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흐렸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빗방울은 듣지 않았다. 가뭄이 심해 비 소식이 꼭 필요한 때였지만, 나는 오늘만은 참아주고 내일부터 쏟아져 메마른 땅을 적셔주길 바랬다. 비 소식만큼이나 절실한 행사가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아침 8시 화전매구보존회 회원들은 고현면에 있는 사무실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정월 대보름 지신밟기 이후 대부분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코로나는 남해에서 열리는 축제며 놀이들을 모두 포기하거나 연기하게 만들었다. 회원들은 연습도 거의 하지 못했고, 그저 빨리 재앙이 물러가기만 기도했다.
흰색 바지저고리에 삼색 띠를 두르고 상모를 쓰는 표정들이 밝아 코로나의 늪을 지나온 이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삼삼오오 차를 나눠 타고 우리들은 ‘유림의 날’ 행사가 있는 읍으로 향했다.
향교 앞마당에서 사또행차를 앞세우고 매구 회원들은 두 사람씩 열을 지어 읍 거리를 행진했다. 태평소의 목청 높이 울리는 자지러지는 소리에 발을 맞추며 북이 아침 공기를 갈랐고, 장구의 날렵한 장단이 흥을 돋우었다. 마스크를 낀 모습이 어색했지만, 얼마 만에 시원하게 두드려보는 가락이었는가!
그렇게 코로나에도 결코 꺾일 수 없는 문화의 깃발은 푸른 하늘에서 펄럭였다.

2시부터 나는 판각문화제 행사의 하나인 주민참여 목공 체험에 참여했다. 대장경을 새기기 위한 판각의 기초가 되는 공부였다. 부처 불(佛)자를 그린 목판을 조각도와 망치로 두드리고 파내다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나는 부랴부랴 도구를 정리하고 유배문학관으로 달려갔다. 오늘은 제11회 김만중문학상 시상식도 있는 날이었다. 나 역시 제2회 때 대상을 탔기에 시상식은 의미가 남다르다. 문학상 심사위원도 해보았지만, 오늘의 시상은 더욱 특별했다.
나는 작품추천위원으로 본심에 올릴 소설 5편을 골랐다. 나름대로 여러 작품을 읽으면서 본심위원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작품을 선정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내가 추천한 작품이 소설 대상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해진은 이미 좋은 소설을 많이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는 작가였다. 우연히 남해도서관에서 그녀의 최근작 <단순한 진심>을 읽었는데, 해외입양아의 뿌리 찾기란 소재가 전혀 식상하지 않은 구성으로 작품 속에 녹아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이 작품을 추천했다. 그리고 대상을 받았다.
8년 전 내가 대상을 받았을 때보다 기분이 더 좋았다. 작품을 보는 안목이 뒤처지지 않는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해진 작가가 12월 17일(목) 오후 7시에 화전도서관 초청으로 합평회에 참석한다니 그때가 기다려진다.

시 부분 대상을 받은 성윤석 시인은 작년, 창원에서 열린 시인 이달균 형의 저자 사인회 때 만나 알게 되었다. 남해로 돌아온 나는 그의 시집을 깡그리 구입해 읽었다. 시대의 신산한 삶이 잘 투영된 작품들에 나는 크게 공감했었다. 그런 그가 대상을 받았으니,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시상식 뒤 나는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성윤석 시인은 나를 대번에 알아보았고, 뜻밖의 수상에 어리둥절했던 조해진 작가도 내가 작품을 추천했다고 하자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한국 문학의 미래를 이끌어갈 두 사람이 김만중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상이 더이상 지방 소도시의 소박한 문학상이 아닌 우리 문단의 지평을 여는 길잡이가 되었음을 알린 사건이다. 신인상을 받은 박세미 시인에게도 축하를 보냈다.

이날 문화행사의 피날레는 남해문화센터 다목적홀에서 있었던 “이순신, 클래식을 만나다”가 장식했다. 역사를 세상에 알리는 이야기꾼 심용환의 해설, 이순신의 삶과 겹쳐지는 베토벤의 교향곡 세 편, 그리고 분위기를 끌어올린 무용. 위기-승리-마음의 순서로 이어진 잘 빚어진 항아리는 음악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움츠러든 마음을 활짝 풀어헤쳤다. 소수의 연주자들로 꾸려진 유니크앙상블의 연주도 품격이 높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축제를 즐겨야 했다.
정말 오랜만에 나는 하루 동안 문학과 음악, 전통이 삼인무(三人舞)를 추는 유쾌한 굿판에서 뛰어놀았다. 유배문학관 상주작가로 근무하면서 군청의 공무원들이 전례 없는 재난에 헌신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감동했다. 그렇게 발로 뛰면서도 그들은 문화의 소중함을 군민들이 잊지 않도록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군민과 공무원이 함께 외치는 소리 높은 아우성으로 코로나의 흙먼지가 말끔히 걷힐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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