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의 계절 가을입니다. 이맘때쯤이면 들판에 펼쳐진 황금색 벼 이삭이 결실의 의미를 더욱 실감 나게 해 줍니다. 한 올 한 올 피어오른 벼이삭이 익기까지 그 긴 시간을 인내하며 정성을 들인 공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사시사철 내내 기후의 변화 속에서도 심기(心氣)를 잃지 않으며 갖가지 병충해마저 극복하며 자란 벼 이삭입니다. 

씨앗을 뿌려 생명을 키우고 그 결실이 수확으로 이어지는 동안 햇살과 비바람의 간섭도 있었을 것이요, 달과 별과 바람 그리고 물과 공기의 순환 또한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한 생명을 도모하는데 우주의 전체 과정이 함께 참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결실로 이어졌으니 여기에 이르도록 뜻을 함께한 뭇 존재의 공인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결실의 계절에 이르러 풍요를 엮어내었으니 그 감사함에 마음을 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제 정말 완연한 가을이구나, 이 가을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지난여름 그 무더위 하며 폭우를 동반한 태풍이 왔을 때도 이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가을이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의지를 결실로 확인해 보고 싶었기에 더욱 그리웠을 가을”이라며 소회를 피력합니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생명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마을 어귀에서 자라나고 있는 감나무도 햇빛의 광합성 작용을 받으며 성장을 도모합니다. 바다에서 생성된 물은 어느덧 비와 이슬로 옮겨져 나무의 수분으로 자리매김하며, 흙은 과거 생명의 흔적이 혼재된 유기질로서 이 순간 나무의 성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자연이 순환하는 가운데에서 결실을 맺어 감이 열리면 사람이 먹고 피를 맑게 하고 아이를 탄생시킬 자양분으로 이어집니다. 아이는 다시 어른이 되어 또 후손을 낳으며 미래로 옮겨가면서 진화합니다. 모두가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하나 속에서 다시 새로운 생명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서로 살리고 살게 해주는 생명의 역할, 그 의미를 얼마나 인정하고 이 순간에 공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의지가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나 전체가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내가 먹는 감 하나라도 그냥 생긴 게 아니요 내가 먹는 물 한 모금이라도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며, 내가 먹는 밥 한 그릇이라도 무심코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전 과정은 모두가 합심하여 이루어진 결과라는 사실을 한갓 자신의 지략으로 왜곡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므로 이 가을에 우리가 느낄 풍요로움도 개인의 만족보다 모두가 풍요로움을 느낄 형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 이러한 소신도 각각의 욕망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고 있는 모습이 그저 안타깝게 다가올 뿐입니다.

요즈음은 옛날과 달리 옷이나 양말을 기워 입는 예가 드뭅니다. 모든 물건이 다 그렇습니다. 낡거나 닳아서 못 입는 게 아니라 입을 수 있는 것도 약간만 떨어져도 그냥 버립니다. 금방 공장에서 나온 신제품도 며칠 못 가 헌것이 되어 버리고 버려지는 새것 같은 헌 것이 넘쳐날 정도로 버림의 정도가 심합니다. 

이렇게 버려지는 물건들이 하루에도 수만 개 된다고 하지만 이런 낭비에 자원이 얼마나 소요되는지 관심조차 두질 않습니다, 일회용 컵이나 플라스틱을 만들기 위해 자연이 훼손되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다 생명이 플라스틱 조각에 질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결국은 욕망의 문제이고 이는 과잉생산으로, 자동화로 이어지면서 자연 파괴는 더욱 가중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로 인해 공해를 유발하고 기후 위기가 닥쳐오고 괴질이 범람하고 심신이 지쳐가는 양상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초 논리적 발상도 이렇듯 소비의 방향에서 갸름해 보면 생명이 엄청나게 파괴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욕구 본능이라 할 먹거리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흔히 포만감으로 상징될 ‘배불러’라는 한마디는 전체 먹거리의 양적 배분 차원에서 볼 때 그리 좋은 표현은 못 됩니다. 

지구 어느 편에는 단 한 끼라도 먹지 못해 굶주림에 지친 사람의 먹을거리를 없애 버리는 형국에서 보면 말입니다. 내가 배불리 먹고 만족하는 사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누군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 역시 전체가 하나의 먹을 음식을 만드는데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지 않았다 하여도 전체 생명의 교우 과정에서 바라보면 그 역시 한 과정에서는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를 외면한 채 먹지 못하는 것이야 그 사람들 사정이라고 일갈해 버린다면 세상에 삭막함을 던져줄 뿐 우리가 취할 전체가 풍요로워지는 길은 어디에서든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풍요를 느끼느냐 아니면 욕망에 젖어 들고 말 것이냐의 여부는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로 끝날 심사(心思)에서 기인될 문제입니다. 
나의 관점을 현상에 둘 것인가 아니면 생명의 전체 질서에 융합하는 삶으로 나아갈 것인가의 판단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만의 나가 아니요 전체로서의 나이며 모두가 큰 나로 성장하기 위한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온통 밖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풍요의 의미를 안으로 돌려보면 어떻겠습니까? 이를테면 나의 마음은 과연 풍요로운가, 나의 정신은 풍요로운가? 풍요조차도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나는 얼마나 자각하고 있는가? 지금 이용하는 물건이나 음식은 어떤 과정을 거쳐 나에게 온 것인가? 풍요조차도 나누어 줄 대상임에 틀림이 없다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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