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둔 요즈음은 어느 동네든 벌초를 하기 위해 분주할 것입니다. 보통 이때쯤이면 예초기 기계음 소리에 산야가 온종일 울릴 정도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해마다 치르는 행사이긴 해도 코로나19 바이러스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만 쉬이 결정 내리기가 쉽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소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가족친지 간에 수차례 의견을 조율합니다. 찬반이 평평한 가운데 일단 안전 수칙을 잘 지키면서 실행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읍니다. 얼마 전 며칠 사이로 태풍이 몰아친 관계로 묘소 주변을 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정된 날 이른 아침, 일행은 벌초를 위해 선산에 오릅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친지들은 모처럼 만난 기쁨으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서도 동심 어린 옛 모습에 화제를 둘 때면 모두 어린아이가 된 듯 기쁨에 젖어들기도 합니다. 그 어린 시절 이곳에서 소를 먹이던 모습 하며 친구들과 떡이랑 부침개를 먹으면서 동심의 나래를 펼치던 모습을 무한히 그리워하면서 말입니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느껴지던 그 모습에 빠져들 즈음 바로 인근에서 누군가가 수고한다며 말을 걸어옵니다. 언뜻 일면식이 있는 듯한 분이기도 하였습니다만 얼굴이 마스크에 가려서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통성명도 하고 누구누구네 집안이고 누구 아들이며 거기에 누가 살았고 어디로 가서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등의 안부를 자세히 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사치레도 이제는 오는 사람도 경계를 해야 하고 설사 이야기를 나눈다 해도 입을 턱 하니 막고 있는 마스크 때문에 목소리가 뚜렷이 나오지도 않는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냥 입속에서 맴돌 목소리마저 가라앉아 버린 모양새가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볼 수 없던 장면입니다. 그는 알고 보니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함께 뛰놀던 아주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필자는 물론 그 역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던 터라 처음에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만 보는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머리도 희끗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목소리마저 마스크에 가려서 음성을 제대로 분간키 어려웠던 터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낯선 감만 돌이킬 뿐입니다. 그때 그를 알아볼 유일한 것이 바로 눈동자와 눈웃음이었습니다. 그의 웃는 눈 모습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한참 뒤에야 서로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어색함에 당황해하면서 겸연쩍게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이 시대를 풍자할 마스크 위의 눈웃음에 멋쩍어하면서 말입니다. 어색한 만남, 가려진 얼굴, 긴장하고 경계하며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눈웃음이 주는 의미가 의외로 크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경계와 거리두기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면 이 안타까움을 어찌하겠습니까? 이런 형국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확인 가능한 눈웃음만이라도 정(情)과 예(禮)의 보고(寶庫)로 남겨지길 바랄 뿐입니다. 

이러한 아쉬움 속에서 웃음도 사라지고 감정의 일단을 식별할 기회마저 사라져 버릴 현실을 목도하면서 필자는 이렇게 예단합니다. “이제 웃음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아니 어쩌면 웃음을 건넬 기력마저 상실될 위기 속에서 눈웃음은 우리의 감성을 담아낼 마지막 보류가 될지도 모른다. 모든 웃음이 사라질 지금 만약 이 눈웃음에서도 웃음을 실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이 마음은 분노와 욕망과 차가움과 냉정의 기세 속에 잠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엄정한 순간에 마음을 추슬러 웃음을 되살려 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지 못한다면 인체 내 면역체계는 더욱 무너지고 질병이 엄습해오는 비운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화해 나도록 심기(心氣)를 보존할 필요가 있습니다. 

눈에도 빛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빛이란 다름 아닌 마음의 빛입니다, 더군다나 마음이나 몸은 빛으로 승화할 능력이 있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이루어낼 수 있는 선명한 마음의 특징입니다. 
마음이 어둡거나 분노의 기운이 퍼져 있으면 눈도 그러한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밝아지면 그 사람의 얼굴이 밝아지고 그 사람이 상대하는 모든 사람도 밝아지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어쩌면 우리가 대면할 수밖에 없는 눈웃음의 미학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눈웃음도 입가의 웃음 못지않게 살뜰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움도 있을 것이요 사랑과 자비와 공경의 에너지도 실려 있을 것이며 진실과 순수와 긍정의 빛이 스며있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눈빛으로 승화된 눈웃음이라면 의외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의 치유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 건강은 웃음의 양에 달렸다거나(제임스 월쉬), 웃음은 생명의 마지막 보루로 천 가지 해로움을 막아주고 생명을 연장시켜준다는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말이 떠오릅니다. 
살아 움직이며 실체의 생명력을 가진 눈웃음, 어쩌면 그 안쪽에 자리한 동공의 생기발랄함이 코로나 19로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사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또한 이만한 열정이라면 이미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우리에게 부여된 웃음을 찾는데도 큰 힘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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