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종  욱작가
임 종 욱작가

생각지도 못한 큰 수확이었다. 그 친구란 분이 호은선사에 대해 뭘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리 소상하게 캐묻고 다녔다면 수확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도 남해 출신이었으니 연고지의 인연이 많이 작용했겠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선사에 대한 관심은 호기심 이상일 것이 분명했다.
“그 친구 분, 어디 가면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우리들 입에서 합창하듯 같은 질문이 나왔다.
“여길 떠난 지 꽤 됐지 아마.”
“돌아가셨나요?”
침이 꼴깍 넘어갔다.
“글쎄, 죽었단 소식은 못 들었으니 숨만 잘 쉬고 있으면 목숨은 부지하고 있겠지요.”
“그럼 어디에……”
“몇 년 전에 지 고향 간다고 내려갔소. 용소라 했지 아마.”
우리들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렇게 사방팔방 찾아 헤매던, 그림의 소식을 가장 잘 알 사람이 바로 등잔불 아래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네 사람은 지금 화방사 봉서루를 찾고 있었다.
호은선사행적비가 있는 바위를 뒤로 하고 우리는 천왕각을 향해 분주하게 걸음을 움직였다. 길었다면 길었던 그림 찾기의 발품이 이제 얼추 끝나려 하고 있었다. 오늘 만날 분에게 금산 그림의 존재와 어디 있는지 여부를 안다면 해피엔딩이겠지만, 이 분마저도 소재를 모른다면 더 이상 열어볼 문은 없었다.
단청문양보존연구회에서 만난 노인장에게 우리는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사무실을 나와 전통찻집에 들어갔다.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효준 형님이 핸드폰 단추를 눌렀다.
전화는 손자며느리가 받았다. 그녀는 시할아버지의 젊은 날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저녁 무렵 용문사에 올라갔는데, 주무시고 내일 내려오실 거라고 전했다.
내려오시거든 아주 중요한 일로 찾아뵙겠다고 전해 달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느낌이 나쁘지 않구마이. 어쩌면 이 영감이 호은선사의 금산 그림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리것네. 하모, 이제 그림은 거지반 우리 손에 들어왔어여.”
효준 형님이 득의에 차 두 손을 비비면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나는 반신반의였다.
“왜 남해신문에 난 호은선사 기사를 못 봤을까요?”
효준 형님의 말문이 살짝 막혔다.
“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것지. 여하튼 내일이면 다 매조지가 될 끼구만.”
시간이 늦어 서울서 자고 아침 일찍 남해로 출발하기로 했다. 빗길을 뚫고 남해로 내려가기는 무리였다.
다음날 아침 전화를 걸었다. 본인이 받았다.
“며늘아기헌티 야그는 다 들었소. 이제 장마도 끝났답디다. 점심 먹고 쉬엄쉬엄 용문사로 올라오시다. 봉서루(鳳棲樓)에 있을끼요.”
천왕각을 지나 석교(石橋)를 건너면 봉서루였다. 봉서루 아래로 계단이 나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대웅전 앞마당이었다.
경내로 들어서자 생각지도 않게 바람이 불어왔다. 계곡을 타고 넘어온 시원한 바람이었다.
한낮임에도 봉서루 안은 창문이 닫혀 있어 다소 어두웠다. 촛불만이 은은하게 사위를 밝혀 주었다.
호은선사 그림의 행방에 대해 들려줄 노인은 방석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있어 마치 등신불을 보는 느낌이었다.
인기척을 듣더니 눈을 떴는데, 눈동자가 혼탁했다.
“와서들 앉으시다. 내가 작년부터 눈이 많이 침침해졌소. 평생 눈으로 온갖 걸 다 봤으니 아쉬울 거야 없지만, 사람 분간이 어정쩡하니 양해들 하시구려.”
우리는 부처를 호위하는 신장(神將)처럼 노인을 둘러싸고 앉았다.
효준 형님이 노인을 찾은 용건을 전달했다.
노인은 눈을 감고 효준 형님이 들려주는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전언이 끝나고도 노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백 년의 세월만큼 더께가 쌓인 침묵이었다. 마침내 노인이 무겁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박 회장이란 분의 마음 씀씀이가 참 고맙구려. 호은선사의 그림이라. 금산을 그린 그림이라. 그런 그림이 있긴 있었지요. 물론 내도 보진 못했고 월주께서도 못 보셨지만서도, 대단한 그림이었다 하더이다.
생각들 해보시오. 금산 보리암하면 관세음보살상을 모신 우리나라 삼대 관음기도도량이 아닌감. 호은선사께서는 관세음보살의 영험이 서려 있는 금산을 그리려고 했다지요. 말세를 맞은 선사께서는, 그 옛날 남해의 민초들이 정성을 모아 대장경을 새겼듯이 그런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셨답니다. 그리고 그 영험이 깃든 그림을 고종 황제에게 올려 다시 한 번 세상을 광정(匡正)하는 보습으로 삼으시려 했지요. 면우 선생이 보셨다는 그림이 바로 그 그림이었을 겝니다.”
노인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우리들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림은 있었던 것이다!
봉윤이 몸을 앞으로 당기면서 다급하게 물었다.
“하모 그 그림은 시방 오데 있십니꺼?”
노인이 잠시 시간을 죽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금산에 있지요.”
“금산 오데요? 보리암입니꺼?”
노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리암에도 있고, 상사바위에도 있고, 쌍홍문에도 있고, 단군성전에도 있지요. 금산에 올라 눈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나 다 있습니다.”
물어보던 봉윤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 무슨 고삐 풀린 선문답인가? 그림이 그렇게 컸다는 비유인지 여러 작품을 그렸다는 말인지 종잡기 어려웠다.
정진혜 팀장이 공무원답게 딱 부러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보존은 잘 되어 있겠지예?”
노인의 흐린 눈빛이 말의 흐름을 따라 움직였다.
“선사께서는 그림을 완성한 뒤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자후를 들으셨답니다. ‘그림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니라. 이 문디야!’ 부처의 음성인지 제석천의 일갈인지 그 한 마디에 선사께서는 엉덩방아를 찧으셨다지요. 목안(目眼)으로 보는 그림은 망상일 뿐이구나. 심안(心眼)으로 볼 때 진정한 그림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이 드러나는 것이구나. 평생 불화를 인증한 증명법사 노릇이 한낱 어린애의 깝치는 놀음이었구나.
그래서 선사께서는 그 길로 그림을 들고 금산을 오르셨답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 그림을 금산의 품으로 돌려보내셨다지요. 이제 제 말의 뜻을 아시겠십니꺼?”
노인은 말을 마치자 다시 눈을 감고 까마득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 버렸다.
그 말의 뜻을 헤아릴 길 없어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몇 달 뙤약볕을 맞고 폭우를 뚫고 다니면서 허둥거리던 노력은 참으로 괴이하게 마무리되어 버렸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노인의 침묵을 뒤로 하고 우리는 봉서루 밖으로 나왔다. 한낮의 해는 지독하게도 눈부셨고, 바람은 진저리나게 시원했다. 새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봉황이 깃든다는 누대 위를 떠도는 흰 구름이 마치 거대한 봉황처럼 보였다.
길을 잃은 사람들처럼 우리는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대웅전 앞마당을 서성거렸다.
이윽고 봉윤이 말했다.
“이제 오데로 가야하지예?”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한참 만에 효준 형님이 새가 와 목을 축이라고 세운 돌 수반으로 가 손을 씻더니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날은 화창하고, 바람은 시원하고, 시상이 다 그림 아이가. 호은선사 그림을 찾았시니, 그 그림 보러 금산으로 가야제. 안 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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