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종  욱작가
임 종 욱작가

나는 효준 형님과 봉윤이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봉윤이 얼굴을 손으로 한번 쓸어내리더니 말했다.
“행님 말씀은 그냥 그렇다는 것이고예. 좋은 일에 마가 낄 수 있다는 염려지예. 다만 그 치들을 저도 좀 아는데, 원칙보다는 이익을 앞세우는 놈들이라 입맛을 다실 게 뻔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더.”
나로서는 딱히 집히는 데가 없는 말이었다. 남해에 분탕질을 치는 위인들이 있는 것은 나도 아는 사실이었고, 누군지도 대강 짐작이 갔다. 사업이라고 벌여놓고 몇 푼 예산 빼먹는 짓거리를 한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호은선사가 그린 그림을 찾는 일이었다. 저들이 발 벗고 나서서 그림을 찾아온다면,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고 했다.
어쨌거나 뜬구름 잡는 걱정에 매달릴 상황은 아니었다. 파장이 이렇게 커진 다음에야 그림 찾기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우리는 군청에서 지원 나온 정진혜 팀장을 만났고, 군청에서는 관용차 한 대를 내주었다. 박 회장님은 필요한 만큼 써도 좋다는 전갈과 함께 신용카드 한 장을 인편으로 보내주었다.
정진혜 팀장은 군청 직원치고는 꽤나 명랑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미 어떤 일인지 설명을 들었는지 우리를 만나자마자 잔뜩 흥분해 있었다.
“어머나, 저 이런 보물찾기 무지 좋아해요. 보물지도만 있었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아쉽다∼∼.”
이후 우리들의 보물찾기는 실패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용문사와 화방사부터 들려 간절히 기도부터 드렸다. 주지스님을 찾아 관련 자료가 있는지 문의했지만 호은선사와 직접 관련된 유품은 나오지 않았다. 주지스님은 연관이 있을 만한 책자와 자료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그림과 관련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이어 구례 화엄사엘 들렸다. 화엄사는 호은선사가 머물렀던 사찰일 뿐만 아니라 선사를 도와 불사(佛事)에 앞장섰던 박필종의 ‘희사공덕비’와 장지연이 쓴 ‘호은대율사비명’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크게 기대를 했다. 그러나 비명을 통해 선사의 행적을 좀 더 소상하게 확인하기는 했지만, 그림과 관련된 정보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오히려 그곳 관계자들도 그런 것이 있었냐면서 찾으면 꼭 연락해 달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들인 품에 비해 얻는 성과가 미약하자 점차 의욕이 줄어들었다. 그 와중에 봉윤이가 집안 일로 부산을 다녀오다가 크게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는 폐차를 해야 할 정도로 부서졌고, 본인도 갈비뼈가 여러 대 나가고 손목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이기 다 부처님 덕분이데이. 아니 호은선사의 음덕이라케야 하나. 니더러 꼭 내 그림 찾아내라고 목심을 살리주신 거 아닌가 싶구마.”
효준 형님이 병실에 누워 끙끙거리는 봉윤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
봉윤은 한 달 정도는 꼼짝 않고 입원해 있어야 했다. 갈비뼈를 다쳐 기브스도 할 수 없었다. 회복은 오직 시간만이 해결할 일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의 보물찾기도 잠시 중단되었다. 셋이 다닐 수도 있었지만, 뭔가 맥이 빠졌다. 한때의 동지였다고 정진혜 팀장도 몇 번 문병을 왔다.
그런 우환 중에 한 차례 촌극도 빚어졌다.
누군가 호은선사의 ‘금산 그림’이라면서 작품을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평소 친분이 있는 남해신문 기자가 알려줬고, 나는 효준 형님과 봉윤이에게 연락했다. 효준 형님은 분한지 목소리마저 부르르 떨렸다.
“고마 한 발 늦었고마. 봉윤이만 저렇코롬 누워있지 않았시몬 우리가 찾아내는긴데, 원통하고 절통해서 우짜노.”
효준 형님은 집안에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애통해 했다. 그만큼 그림 찾기에 대한 집념과 기대가 남달랐다. 병석에 누운 봉윤이도 소식을 듣더니 입맛만 쩝쩝 다셨다.
나로서도 허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찾았든 호은선사의 그림이 세상에 나온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어쨌거나 나도 그 결과에 한 몫 한 셈이니 위안은 되었다. 그간의 노력이 공염불은 아니었다고 위로했지만, 씁쓸한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호은선사의 그림은 박 회장 회사 본사 건물 회의실에서 공개될 예정이었다.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성화를 부린 모양이었다. 나는 박 회장님에게 축하 인사와 함께 감정을 전문가에게 받으라고 권했다. 호은선사의 그림으로 전하는 작품은 한 점도 없으니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전문가라면 뭔가 근거를 잡아내리라 믿었다. 또 그런 절차를 거쳐야 그림의 가치도 인정받았다.
몇 달 동안의 고생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아쉬움은 꽤나 묵직하게 우리들 주변을 맴돌았다. 꿈에 웬 스님이 나타나 잔뜩 화난 얼굴로 달려오며 주장자를 휘두르더라고 하면서, “이기 당췌 무신 꿈이고?” 하며 효준 형님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다.
“그기 용꿈이것소? 개꿈이제.”
병원에서 퇴원한 봉윤이가 간이 기브스를 두른 채 실실 웃었다.
그러나 공개하기로 한 전날 기자회견은 취소되었다. 그림이 위작으로 판명났기 때문이었다. 전문가가 1901년 그려진 작품의 물감에서는 나올 수 없는 물질을 추출해낸 것이었다. 정교하게 위조했지만, 검증의 그물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기죄로 제보자를 고발해야 한다고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박 회장님은 다 자신의 부덕이요 조상에 대한 공경이 부족한 데 온 결과라며 없던 일로 덮어 버렸다.
그 때문에 제보자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잘 됐다 케야 하냐? 못 됐다 케야 하냐? 내사 사뭇 귀신에 씐 기분일세그려.”
효준 형님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했다.
“잘 된 일이제 뭘 고민합니꺼. 낼부터라도 다시 찾아나섭시더.”
팔이 부러진 뒤 봉윤은 오히려 의욕이 펄펄 넘쳤다.
“아따, 봉윤이가 염라대왕 코앞까지 면담 갔다온께 무시운 게 없는 갑다.”
네 사람의 의욕은 다시 불길이 치솟았지만, 돌파구까지 시원하게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박 회장을 만나 다시 탐사에 나서겠다고 전하니, 손을 잡으면서 서두르지 말고 힘써달라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읍내 커피숍에 모여 대책을 고민했다. 봉윤이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돌이켜보니 우리들의 접근 방법이 좀 무모했다는 생각도 드네예. 무작정 작품을 찾아다닐 게 아니라 작품에 대해 아는 사람을 찾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네예.”
효준 형님이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그림이야 남아있을지 몰라도, 사람이 아즉 살아 있것나? 백 년도 훨씬 지났는디.”
“호은선사를 만난 사람이 살아 있을 리야 없겠지예. 그라도 그만한 명성을 가진 분이었시니, 호은선사에 대해 전해들은 사람은 있지 않을까예. 작품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사람을 중심으로 작품에 접근하자는 거죠.”
그 방법도 그럴 듯하게 들렸다. 호은선사는 살면서 대단히 폭넓은 활동을 했고, 또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특히 완호낙현(玩虎洛現, 1869-1933) 스님은 우리나라 불교 미술에서 세 분의 거목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월주덕문(月洲德文, 1913-1992) 스님의 스승이었는데, 대단히 뛰어난 화승이었다. 그가 바로 호은선사의 제자였다. 이들은 주로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였다.
부산으로 가 월주 스님의 제자나 지인을 수배해 보기로 했다. 하늘이 뚫린 듯 내리는 폭우도 우리의 갈 길을 막지는 못했다.
월주 스님은 1972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丹靑匠)이 되었다. 이만한 기량을 인정받았다면 당연히 제자도 많이 길러냈을 법했다. 스승의 스승되는 호은선사의 삶이나 작품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이고, 다시 제자들에게도 전해졌을 여지가 많았다.
부산에서 수소문한 결과 월주 스님은 생애 후반기에는 서울에서 주로 활동했고, 입적한 사찰도 서울 흥천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자 중에 소운(素雲) 김용우(金容宇) 선생이 있다고 했다. 부산에서 만난 이들은 월주 스님의 스승 완호낙현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분의 스승인 호은문성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결국 우리들의 발걸음은 퍼붓는 빗길을 뚫고 서울로 향해야 했다. 2014년에 김용우 선생이 스님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흥천사에서 열었다. 흥천사를 찾아가면 뭔가 호은선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또 월주 스님이 창립한 사단법인 단청문양보존연구회도 꾸준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하니, 이쪽 사람들을 만나면 호은선사의 그림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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