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순수 의식이라 함은 있는 그대로 인위적인 힘이 가미되지 않는 본래 그대로의 모습을 말합니다. 본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참 아름답고 유쾌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연 생명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도 이처럼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게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요. 아마 그것은 그들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순수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말 그대로 순수 의식이 생명 유지의 비결인 셈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연 본래의 순수 의식을 동경하며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순수 의식에 이르도록 살아왔는가를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일 것입니다. 그만큼 삶이 복잡해진 까닭에 순수와 같은 기분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는 게 솔직한 답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 어쩌면 순수를 이끌기 위하여 자신에게 내재된 습관이나 망상을 떨쳐버리기가 힘든 부분도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그나마 순수 의식에 가까운 삶을 정의해 본다면 아무래도 자연에 동화되는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1980년대를 이어온 세대라면 경험적으로 어느 정도는 순수 의식과 가까운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우마다 다 다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자연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을 뒷산을 오르내리며 소를 먹이거나 나무를 하던 모습은 바로 엊그제 일처럼 우리들의 뇌리 속에 생생하게 기억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지척에 깔려있는 꽃을 보며 그 모습에 감동하기도 하고 들과 산을 넘나들며 뛰놀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자연에 순응하며 순수의 결대로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비록 순수 자연에 완벽히 동화되지는 못하였을지라도 자연에 순응하는 방식을 스스럼없이 택한 동심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그때는 작은 미물의 생명이거나 한 마리 새가 다치기만 해도 그를 안쓰럽게 여겨 보살피려는 애틋하고도 순수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인위적인 방편에 익숙한 채 자연과 멀어진 오늘의 생활방식에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순수 의식에서 멀어진 삶이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가에 대한 우려의 시선입니다. 

필자 또한 자연에 순응하며 순수의식에 부합하는 삶이야말로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킬 최적의 방책임을 애써 강조하여 왔습니다. 어느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순간보다 오히려 과거의 정서가 우리에게 잠재된 순수의식을 일으키기에 적합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순수는 언제 어디서든 마음에서 순연한 의식을 일으킬 자세를 견지하기만 해도 항시 맞이할 수 있는 의기(義氣) 그 자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몸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순수의식을 만나는 작업은 쉼 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예감이라도 한 듯 필자는 얼마 전 순수 의식의 결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실감 나게 경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태풍이 남해지역을 엄습하던 때였습니다. 지인들과의 모임을 마치고 미조에서 상주로 넘어오던 밤길은 그야말로 쏟아지는 폭우와 거센 바람으로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거의 칠흑 같은 어두움에 신경을 곤두세울 즈음 갑자기 새끼 고라니 한 마리가 차로 한복판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맞닥트린 일이라 필자는 물론 고라니까지도 놀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습니다. 흐릿해진 시야에 마치 섬광이 번쩍거리듯 새하얀 눈동자가 움직이기에 ‘저것이 뭐지’ 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와 시선이 딱 마주친 것입니다. 필자의 차량 바로 앞에서 시선이 마주친 고라니는 어미에게서 떨어진 너무나 어리고 여린 새끼 고라니였습니다. 얼마나 작고 여린 지 가히 측은지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새끼 고라니도 안심한 듯 필자의 차 앞에서 멈춘 채 마주친 시선을 놓지 않았습니다. 평평한 긴장감도 잠시,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당혹감은 어느덧 사라지고 그의 눈동자가 아주 선명하게 각인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밝은 눈동자에 풍기는 영롱함은 순수 자연의 원형이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의 눈동자에 매료된 필자도 차츰 그의 모습에 동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소에 지녀왔던 고라니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사라지고 자연 그대로의 순수를 만난 기쁨에 마음이 들뜰 정도였습니다. 언제 이처럼 맑은 눈을 가진 동물을 만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우리는 정녕 순수를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는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주었다고나 할까요. 마치 우리가 생활하면서 늘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천연의 것, 자연 그대로의 순수임을 알려 주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지만 그때 만난 고라니의 영롱한 눈동자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순수의 눈이었습니다. 이를 보면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도는 순수의식은 우리의 정서를 건전하게 이끌 자양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이 의식은 당장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 곳이라도 생각을 모으면 현실에 반응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의식은 무한정 떠오르지만 생각하지 않으면 무의식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의식과 무의식의 양단에서 순수를 일으킬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스스로 순수의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순수의식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지 여과 없이 일어날 수 있도록 키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힘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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