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읍성을 복원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읍성은 고려 말 왜구를 물리치고 난 다음 나라가 안정되자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경과 연해지역에 쌓기 시작하였다. 
조선 태종 때부터는 경상, 전라, 충청 연해안을 중심으로 축성의 위치, 규모와 방법을 정하여 쌓았으며 동국여지에는 95개, 세종지리지에는 69개의 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1910년 일제의 읍성철거령에 따라 대부분의 읍성은 허물어져 주택이 들어서고 축대나 담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남해읍성은 2009년 권순강의 ‘공간구성과 축성기법연구’와 2014년 서문지 조사, 2019년 성지 조사를 하였다. 서지자료는 정이오의 남해읍성기를 기록한 지리지와 읍지, 그리고 교은집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해현편 성곽에서 읍성은 “石築周2876尺高13尺內有井1泉5四時不渴”이라 기록하고 정이오의 기(記)를 실었다. 읍성은 정이오의 기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하였지만 사실 그러한지 그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정이오(1347~1434)는 조선 초기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수가, 호는 교은(郊隱)이며 부는 정신중이다. 고려 공민왕 23년(1374)에 문과에 급제하여 태조(1394) 때는 지선주사, 정종 2년(1400)에는 성균관악정, 태종 3년(1403)에는 대사성을 지냈다. 1418년 72세에 벼슬을 그만두었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실증고사가 되어 진주 곤명을 태소(胎所)로 정하는 일에 관여하였다. 정이오가 쓴 남해읍성기의 기문 내용은 그 시대의 기록이므로 구체적이고 사실에 근거한 기문으로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해현은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그 땅이 비옥하여 생산물이 충실하고 번성하나 그 지역이 왜국과 가까워서 경인년(고려 충정 2년, 1350)부터 왜구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여 백성들이 잡혀가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이 고을에 딸린 평산과 난포 두 현은 텅 비어 사람 없는 땅으로 8년이 지났다. 정유년(고려 공민 6년, 1357)에 남해를 떠나 육지로 나가 진양의 선천들판에서 집 없이 들어 살았다. 땅을 지키지 못하여 세공을 다스리거나 공부에 실린 재산과 소출을 거두는 것을 초야에 던져 버리고, 목장이 왜구의 소굴이 된지 46년이 지났다. 

이제 모두 힘을 합하여 해전을 대비하고 성을 설치하여 육지를 지키니 적세가 날로 쇠퇴하였다. 임금이 즉위한지 4년(태종, 1404)에 임덕수(任德秀)를 등용하여 구라량만호(仇羅梁萬戶)로 삼고 겸하여 이 고을의 현령이 되게 하였다. 현령이 부임하여 계획을 세워 군민을 위한 사업을 일으키고 폐단을 없애니 군세가 정비되고 민사도 거양되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지역은 좁고 험하지만 옛 땅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듣고 민중과 협의한 다음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 최유경에게 사유를 청원하였더니 조정에서 듣고 이웃 고을 하동, 사천, 거제, 고성, 진해 등 다섯 고을 사람을 출력시켜 고현(古縣)의 외딴 섬 복판에 돌을 포개어 견고하게 성을 쌓고 참호와 해자(垓字)를 팠다. 

공사는 2월에 일을 시작해서 3월 길일에 마쳤다. 남해 백성들이 농원의 농막으로 돌아와서 밭을 갈고 집을 꾸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며 즐기고 화락하였다. 수령(侯)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청하였다. 이 고을은 하늘 끝닿은 남쪽의 아름다운 곳이며 해산물이 풍요롭고 토산물도 풍부하니 국가의 쓰임에 필수적인 바라 진도, 거제 양군의 부흥도 또한 기대할 수 있겠다.”
기문의 내용을 왕조실록과 지리지의 기록과 비교해 보고 나름대로 추정 가능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왜구의 소굴이 된지 46년이 지났다는 것과 상 즉위 4년이 언제인가라는 것이다. 먼저 46년이 언제부터인가는 1350년과 1357년을 기준으로 볼 때 1396년(태조3)과 1403년(태종3)이 된다. 또한 상 즉위 4년은 태조 즉위 4년(1397)과 태종 즉위 4년(1404)이 된다. 상(上)이라는 말은 임금을 칭하는 말이지만 상왕을 칭하는 말이기도 하며 지금 왕은 금상이라 칭한다. 태조의 재위는 1398년까지였지만 태종 8년(1408)까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상왕으로 불리었다.

둘째는 도관찰출척사 최유경에 사유를 청하였다는 기록이다. 최유경(1343~1413)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본은 전주, 자는 경지, 호는 죽정이다. 태조 3년(1394)부터 7년(1398)까지 도관찰출척사를 지냈다. 정종 2년(1400)에는 참판삼군부사, 태종 3년(1403) 대사헌, 4년(1404) 판한성부사, 13년(1413)에는 참찬의정부사를 지냈다.
최유경은 태종 4년에는 도관찰사직에 있지 않았다. 도관찰출척사는 고려 말 도관찰사인 안찰사를 이르는 말로 1392년 혁파되었다가 태조 2년(1393)에 복구되었으며 태종 1년(1401)에는 안렴사로 부르다 태종 2년에 다시 복구하여 일부지역에 사용하다 1466년에 관찰사로 통일되었다.

셋째는 공사는 2월에 시작하여 3월에 끝이 났다는 기록이다. 일반적으로 석성을 축성하는 데는 몇 년이 걸리는 공사인데 어떻게 2개월 만에 끝이 났을 가하는 의문이다. 참고로 낙안읍성의 경우는 본래 토성이었는데 석성으로 개수하는데 사전에 모든 것을 준비하여 공사기간은 1개월에 끝냈다고 하니 본래 성이 있는 것을 석성으로 보완하는 것은 가능한 것으로 본다.

넷째는 임덕수를 추천하여 구라량만호 겸 현령을 삼았다는 기록이다. 임덕수는 생몰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말 문신으로 1342년에 1등공신이 된 임자송의 자이며, 익제 이제현(1287~1367)의 사위(졸고천백)이다. 정4품 좌우위호군(정4품)에서 3품 수군만호에 천거된 것으로 보인다. 호군은 고려시대 영의 지휘관으로 장군으로 불리다 공민왕이 호군으로 개칭, 조선 초에는 사마, 태종 3년에 호군으로 복구하였다.

다섯째는 지리지에 기록된 내용이 다르다. 조선환여승람에는 세종 9년(정미,1427)에 축성하였다. 진주진관지에는 세조 4년(기묘,1459)에 축성하였다. 남해읍지에는 정통 2년(세종 19년,1437)읍을 설치하였다. 경상도속찬지리지(1496년)에는 석축 둘레 1740척, 높이 10척, 폭 11척, 고현리 화금현에 임오년(태종2,1402)에 축성하였으며, 기미년(세종21,1439)에 죽산리로 이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섯째는 조선왕조실록 세종 13년(1431)에 남해는 본도 중앙에 성을 쌓고 무인을 임명하여 지키고 방어를 해야한다. 세종 16년(1434) 8월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지난해 시작해서 쌓은 성이 마치지 못한 것을 금년에 마치게 하라. 남해에 쌓은 성은 선군을 부려 쌓았으나 추위와 장마, 더위와 방어하기를 긴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쌓게 하라. 세종 19년에는 남해는 주민은 많은데 관할하는 곳이 없어 현을 설치해야한다는 읍성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상의 자료를 종합하여 정리를 하면 정이오의 남해읍성기는 고현리(古縣里) 화금현(火金峴. 비란리)에 있었던 고현성(1740척, 높이 10-11척)의 기문으로 추정된다. 기문은 성이 완성되었을 때 쓰는 것으로, 죽산리에 쌓은 성에 대한 기문이라고 한다면 1434년에 이미 사망한 사람이 쓴 것이 된다. 남해읍성은 세종 15년에 시작하여 세종 19년에 이전한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야천부곡에 교거한 후에 남해로 다시 돌아온 것이 태조 3년(1396)이거나 아니면 태종 3년(1403)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후 세종 19년(1437)에 새로운 성으로 이전하여 현을 다시 설치할 때 까지 30여 년 간을 고현성에서 관할하는 곳이 없이 평산, 노량 수군만호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 잃어버린 30년의 역사를 찾는 실마리가 되는 기문이라고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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